[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정부 정보시스템 647개가 동시에 멈췄다. 단일 거점 장애로 복지·의료 서비스가 일시에 중단되면서 ‘세계 1위 전자정부’라는 간판 뒤에 숨은 취약성이 노출됐다. 중앙집중형 데이터센터 의존과 허술한 재난 대응 체계가 한계를 드러낸 가운데 효율과 속도를 앞세운 한국식 전자정부 모델이 정작 국민 권리 보장이라는 기본 책무 앞에서 무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6일 국립병원 전산망이 멈추면서 진료 기록 조회와 응급환자 이송이 지연, 장기·혈액 관리 체계와 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 중단으로 이식 대기자 매칭과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에 차질을 빚었다. 장례 예약망과 감염병 방역망까지 멈추자 장례 절차와 역학조사까지 영향을 받았다. 대형 병원의 응급실과 일반 진료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영됐지만, 장기 기증·이식이나 연명의료 의사결정처럼 공공 전산망 의존도가 높은 영역에서는 수기 대응이 불가피했다.
행정안전부가 공개한 장애 목록에 따르면 국립정신병원 전산망은 물론 소록도병원·국립재활원·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까지 마비됐다. 결핵 전문 진료와 연구를 담당하는 국립목포·마산병원도 포함됐다. 핵심 공공의료기관까지 광범위하게 멈추면서 정신질환 치료, 재활·기증 관리, 감염병 대응 등 필수 의료 영역 전반에 공백이 확인됐다.
피해 범위는 복지망까지 확대됐다. ‘복지로’와 사회보장정보망이 멈추자 바우처 신청, 돌봄 지원, 긴급복지 접수도 복구 이전까지 일시에 차단됐다. 온라인 접수는 물론 수기 대체도 불가능해 현장에서는 불만이 잇따랐다. 취약계층의 최소 권리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복지국가 시스템이 불안정한 인프라에 의존,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사고 나흘 뒤 전체 시스템 가운데 정상화된 것은 85개, 1등급 핵심 시스템 36개 중에서도 20개뿐이었다. ‘복지로’는 재가동됐지만 의료 분야를 비롯한 다수 서비스는 여전히 운영이 불투명한 상태다.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와 화장장 예약망(e하늘장사정보시스템)은 서버가 전소돼 정상 운영까지 수주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질병관리청은 긴급 대응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감염병 신고 체계를 유선과 팩스로 전환했다. 제1급 감염병, 원인불명 감염병, 생물테러감염병 사례는 즉시 유선 신고하도록 하고, 제2~3급 감염병은 집단 발생이 의심될 경우 종합상황실이나 보건소로 유선·팩스 신고를 안내했다. 다만, 필수 보건 서비스 가운데 10월 독감 예방접종을 담당하는 ‘예방접종도우미’ 누리집이 정상 가동되면서 큰 차질은 발생하지 않았다.
임시 대응이 이어진 가운데 복구 단계에서 서비스별 격차도 나타났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우편·금융 서비스가 우선 복구됐지만, 복지·의료 서비스가 후순위로 밀린 점에서 재난 대응 체계가 여전히 ‘효율 우선’ 기조에 묶여 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한국식 디지털 행정의 강점으로 꼽혀온 중앙집중형 통합이 이번 사태에서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고 경고했다. 데이터센터가 단일 거점에 집중되면서 발생한 장애가 복지·의료 서비스 전반으로 번졌다는 분석이다.
반면 주요국들은 분산 배치와 이중화를 통해 리스크를 줄여왔다. 독일은 연방주 단위로 복지·의료 전산망을 분산 배치해 특정 지역 재난이 전국 서비스로 번지지 않도록 설계했다. 일본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가 핵심 정보망을 도쿄·오사카 등 복수 거점에 분산하고 실시간 백업 체계를 운영한다. OECD 국가들이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분산화·이중화를 강화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번 화재로 정부가 추진해 온 디지털 전환 정책의 허점도 부각됐다. 전자정부·스마트 복지·AI 행정을 미래 모델로 내세워왔지만, 안정성과 복원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국민 권리 보장과 서비스 연속성 모두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바우처 중단은 생계 지원 차질로, 장기 관리망 중단은 환자 안전 위협으로 이어졌다. 디지털 전환이 복지국가 안전망을 곧장 강화한다는 인식이 설득력을 잃은 셈이다.
복지부는 이 같은 서비스 중단에 대비해 업무 연속성 확보 방안을 논의했다. 지자체·시설 방문이나 유선 신청을 통한 수기 처리 절차, 서비스 선제공 후 정산, 서류 수기 작성·보관 후 추후 반영 등의 대체 행정절차를 마련해 점검에 나섰다고 밝혔다.
다만 임시 조치만으로는 국가 핵심 인프라의 구조적 취약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복지·의료 시스템을 포함한 국가 핵심 데이터센터는 다중화·분산화가 필수”라며 “전산 장애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서비스를 보장할 수 있는 비상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스템 간 의존도를 줄이는 독립 모듈화가 병행돼야 한다”며 “분유 지원이나 생계비 신청처럼 국민 생활과 직결된 복지 서비스까지 포함되는 만큼, 디지털 행정을 단순한 비용 절감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가안보 수준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재정과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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