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고기는 진리’라고 할 정도로 우리 식생활에서 축산물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삼겹살과 치킨은 대중적인 외식 메뉴로 굳건한 자리를 점하고 있으며 치즈, 요구르트 등은 MZ세대에게도 인기가 높다.
으레 소비가 늘어나면 해당 분야의 산업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축산물 소비가 늘어나는 와중에도 국내 축산업의 생산 기반은 반대 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늘어난 소비의 상당 부분을 수입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우리나라 최초의 FTA인 한-칠레 FTA 체결 이후 20년이 흘렀다. 2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축산업은 축종을 불문하고 본격적인 무관세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이전까지도 파괴적이었던 FTA의 영향력이 과거보다 더욱 거세질 것이란 의미다.
“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 과거 시대를 주름잡던 유행어 중 하나다. 하지만 축산관계자 중 누구도 이 유행어에 시원하게 웃지 못했다. 축산업에서는 실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는 질문 앞에 이제는 정부,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응답이 절실하다.
【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축산물은 고기만 있지 않다. 우유 역시 젖소에서 생산되는 축산물이다. 즉, FTA 무관세 파고에 낙농업 역시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제 낙농업과 우유에 대한 사회 공통의 의견을 모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 1월 미국산 우유가 무관세로 수입되며 EU산 우유는 내년 6월부터 무관세로 수입된다. 최근 국내 우유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있는 폴란드가 EU 회원국이다. 이에 국내 유업계는 사업 다각화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로 시장 변화에 대응하겠다는 분위기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지난해 프리미엄 우유로 ‘A2+(에이투플러스) 우유’를 출시하고 오는 2030년까지 A2 원유 비율을 100%로 늘리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A2+ 우유는 100% 국산 A2 우유에 체세포수 1등급, 세균수 1A 원유와 EFL 공법을 더한 프리미엄 제품이다.
남양유업은 지난달 건강 음료 시장에서 ‘제로 투 맥스(Zero to Max)’ 전략을 본격화한다고 밝혔다. 설탕을 아예 빼는 ‘제로’ 제품과 단백질을 극대화한 ‘테이크핏 몬스터’ 등의 음료 등으로 소비자 요구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에 지난달 4일에는 가공유 제품군 중 최초로 설탕 첨가 제로 콘셉트인 ‘초코에몽 Mini 무가당’을 내놓기도 했다.
매일유업은 치즈 전문 브랜드 상하치즈의 후레쉬치즈가 벨기에 국제식음료품평원(ITI)이 주최하는 국제 식음료 품평회에서 지난 2019년과 2022년에 이어 올해에도 수상하는 등 우수한 품질을 앞세우고 있다. 상하치즈는 100% 국산원유를 사용하며 고창군 상하면의 깨끗한 환경에서 엄선된 원료와 치즈 장인들의 기술을 더한 고품질 치즈를 추구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해 7월 낙농산업 중장기 발전 대책을 내놓고 지속가능한 낙농산업 발전을 천명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저비용 원유 생산체계 구축 ▲유제품 생산·유통 비용 절감 ▲국산 유제품 수요 발굴 등 3대 핵심 전략을 통해 국산 원유의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2분기 소비 늘었는데 재고는 더 쌓여…유제품 수입 급증 원인
정부와 유업계가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해외 유제품 수입량은 크게 늘어나는 분위기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유제품 수입량은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해 19.3% 증가한 9만6000톤을 기록했다. 치즈 수입량은 같은 기간 동안 50.5% 증가해 올해 1분기 3만6000톤을 수입했다.
원유로 환산한 올해 2분기 유제품 수입량은 57만톤으로 지난해 2분기 대비 4.6% 늘어났다. 버터 수입량은 동기간 50.9% 급증하며 1만톤에 달했다. 결국 2분기 유제품 소비량(원유 환산)은 119만1000톤으로 지난해 2분기와 비교해 18.1% 늘었지만 6월 기준 분유 재고량은 되려 지난해 2분기 대비 83.8% 증가한 16만4000톤(원유 환산)을 기록했다.
분유 재고량은 지난 2023년 4분기 4만9087톤 수준이었으나 그 이후 꾸준히 상승해 1년 반 만에 3배 넘게 불어났다. 원유는 오래 보관할 수 없어 재고는 전지·탈지 분유로 가공해 저장한다. 분유 재고량이 급증했다는 것은 그만큼 국산 원유가 시장에서 남았다는 뜻이 된다.
올해 2분기 원유 생산량은 51만3000톤으로 지난해 2분기 대비 1.5% 상승에 그쳤다. 공급과잉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유제품 수입이 늘어나며 국산 원유 소비가 위축된 게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각에서는 흰 우유 가격 인상 등 밀크플레이션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국산 원유가격은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동결(리터당 1084원)된 상태다.
현재 원유가격 결정은 202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용도별 차등가격제로 정해지고 있다. 생산비 변동과 원유 수급 상황을 함께 반영하는 제도로 치즈, 분유 등 가공 유제품에 사용하는 가공유 가격을 따로 책정한다. 현재 가공유 가격은 지난해 리터당 5원 인하해 리터당 882원이다.
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언론 보도에서 여전히 ‘밀크플레이션’만 강조돼 낙농농가들의 원유 가격 동결 노력이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라며 “우유 생산비는 2020년 리터당 809원, 2022년 리터당 958원, 2024년 리터당 1018원으로 꾸준히 상승하는데도 농가들은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해 원유가격 동결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이어가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유값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인식은 사실과 다르며 제도와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라고 당부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우유 자급률은 46.7%다. 절반 이상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가공 유제품 수입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 관세율 철폐가 예정돼 있고 사육두수 및 사육농가수는 점차 줄고 있어 자급률은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자급률 하락은 치즈, 버터 등 유제품의 수입 의존도가 더 높아진다는 뜻이며 결국 정부의 물가안정을 위한 시장대응력이 점차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공산이 높다. 당장의 물가안정을 넘어 국내 낙농 생산기반 안정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줄어든 수입·불안정한 제도…깊은 고민 빠진 낙농가
통계청 가축동향조사에 따르면 2분기 기준 젖소 사육마리수는 37만1000마리이며 사육농가수는 5347가구이다. 지난 2021년 젖소 사육마리수는 40만1000마리, 사육농가수는 6105가구였지만 다음해인 2022년 사육마리수 40만마리와 사육농가수 6000가구 선이 무너져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낙농가들 역시 축산농가 대부분이 겪는 고충을 안고 있다. 축사, 착유실, 원유탱크 등 전문 설비가 필요해 진입장벽이 높은데 여기에 환경 및 방역 규제가 강해지면서 사실상 신규 진입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게 됐다. 여기에 유제품 수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국내 낙농가의 설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충남 아산시 도고면에서 젖소 60두를 사육하는 박성호(34)씨는 지난 2017년부터 목장을 운영하는 후계낙농인이다. 박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장을 운영하면서 젖소도 20두 가량 늘리고 무허가축사 양성화와 함께 노후된 축사시설도 손을 봤다”고 자신의 현재 사정을 설명했다.
젖소를 들이면서 쿼터도 1억원 남짓을 추가 구입했다. 국내 낙농농가는 각자 원유 생산량을 제한하는 쿼터를 갖고 있으며 쿼터는 농가 사이의 거래가 가능하다. 신선식품인 우유의 안정적인 수급 관리를 위해 도입한 제도로 쿼터는 농가의 재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박씨는 혼자 매일 목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젖소를 사육하며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목장에 가서 젖소들과 주변을 살펴보고 사료를 급이한다. 그 다음 청소를 하고 뒷정리를 하면 오전 9시쯤이 된다. 오후 4시부터는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라고 하루의 일과를 설명했다.
낙농가의 하루 일과에서 빠질 수 없는 작업이 착유다. 임신한 젖소는 하루에 2번 반드시 착유를 해야 한다. 이 역시 착유기, 원유저장실, 기계실 등 장치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들 장치는 특별히 청결한 관리에 힘써야 한다. 박씨는 “계절마다 다르지만 보통 하루에 880리터 정도 생산한다. 불가피하게 목장을 비워야 할 때에는 낙농헬퍼(낙농업 전문 도우미)를 활용하는데 한달 넘게 여유를 둬야 예약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낙농가마다 유업체와의 계약 형태는 제각각이다. 박씨는 집유조합인 아산축협을 거쳐 남양유업, 연세우유 등에 원유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집유조합을 거치면 상대적으로 거래 교섭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최근에는 유업체들이 집유조합 비중을 점차 줄이려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아산지역은 이번 여름에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박씨는 “목장 안으로 물이 많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호우 피해가 작은 편”이라며 “물이 빠진 다음에 큰 도움은 아니지만 인근에 복구 지원을 나가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이렇게 자연재해가 계속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이다. 가축재해보험이 있는데 매년 200만원 가까이 내야 하더라. 그래서 가입하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미래를 대비하려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둬 다시 목장에 투자를 해야 하지만 여건이 녹록치 않다. 원유가격 책정 방법이 달라진 뒤 수입이 줄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생산비 연동제인 원유가격연동제에서 용도별 차등가격제로 바뀐 뒤 수입이 줄기는 했다”라며 “수입을 늘리려면 쿼터를 사던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제도가 언제 또 바뀔지 모르니까 망설여진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힘들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다. 자부심을 갖고 낙농업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조금이나마 낙농가의 현실에 대해 이해해준다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국산 유제품 늘리려면 ‘경쟁력 강화 지원’ 예산 확보돼야
지난 6월 대선을 앞두고 생산자단체인 한국낙농육우협회는 낙농분야 3대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협회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국내산 우유·유제품 공급망 확보를 위한 예산 확충 ▲사회적 비용 절감과 보편적 복지를 위한 공공 우유급식 제도화 ▲소비자 선택권 보장 및 편익 증진을 위한 우유 관련 제도개선 등이다.
특히 낙농육우협회는 국산 우유의 자급률을 높이려면 용도별 국산 원유 사용 확대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국산 유제품 경쟁력 강화지원 사업 예산이 기존 연간 400억원대에서 700억원 이상으로 확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지태 낙농육우협회 정책기획상무는 “용도별 차등가격제로 전환하면서 정부는 가공용 원유 사용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했다. 예산을 투입해 가공용 비중을 늘리면 유업체의 국산 원유 구매량이 늘어나니 자급률을 유지할 수 있다”라며 “결국 예산확보가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국산 원유는 계절 편차 생산량이 있는 동절기에 주로 가공용으로 공급되고 있다. 낙농육우협회는 국산 유제품 경쟁력 강화 지원 예산이 약 45억원 가량 증액되면 원유가 모자라는 여름철에도 안정적인 가공용 원유 수급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어 한 상무는 “공공급식 분야를 보면 학생 수 감소보다 더 큰 폭으로 국산 우유 소비량이 줄고 있다. 미국, EU, 일본을 보면 학교급식 메뉴에 우유가 들어간다. 학생들 영양을 생각해서라도 우유급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낙농육우협회는 공공분야에서 학교뿐 아니라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한 상무는 “예전에는 쿼터를 벗어난 초과생산 우유만 리터당 100원에 공급됐다. 그런데 지금은 쿼터 안에 있더라도 음용률과 가공률을 반영해 ‘100원 우유’(리터당 100원 공급)가 나오고 있다”면서 “기후변화로 젖소 관리가 더욱 까다로워지고 있다. 또, 전기 소비는 늘어나는데 전기료는 인상되니 생산비는 점차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생산기반을 안정하려면 정책자금 상환연장, 사료가격 대책 등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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