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임나래 기자] 지난 29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대강당.
이찬진 금감원장이 단상에 올라선 순간, 단어 하나가 무대 전체를 지배했다. “금융소비자.”
그는 연설에서 이 단어를 30차례 반복했다. 장내는 고요했지만, 반복되는 어휘는 감독 철학의 변화를 강조하는 메시지였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최근 조직 개편 논란의 한복판에서 던진 방향 전환 선언이었다.
◇위기를 막았지만, 소비자는 뒷전이었던 과거
금융위기 때마다 금감원의 최우선 목표는 시장 안정과 건전성 유지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금융소비자 보호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규제와 제재는 강했지만, 피해 예방은 미흡했고, 감독은 늘 사후 구제 중심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찬진 원장은 이런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구조”라고 말했다. ‘금융소비자를 감독의 최종 목적지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독립성과 소비자 보호, 충돌한 개편 논란
정치권은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명분으로 ‘금융소비자원 신설’과 ‘금감원의 공공기관 지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정치적 통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여름 내내 대립은 이어졌다. 금융위와 여당이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금감원 노조와 간부진의 반발은 거세졌고, 일부 학계와 야당에서도 “감독 독립성 훼손”을 우려했다. ‘감독권 수호’와 ‘소비자 보호 강화’라는 두 기조가 충돌하는 동안, 금감원 내부도 흔들렸다.
◇백지화 선언과 뉴욕 합의
8월, 정부와 금융당국은 조직 개편 백지화를 선언했다. 후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감독 철학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됐다.
돌파구는 대통령 해외 순방 일정 중 뉴욕에서 마련됐다. 이찬진 원장과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긴급 회동을 갖고 공동 발표문을 내놨다. “행정·감독 쇄신,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 개편 대신 감독 철학의 전환을 추진하기로 합의하면서 장기 대립은 일단락됐다.
◇“소비자는 보호 대상 아닌 주체”
29일 결의대회에서 이 원장은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다시 전면에 세웠다. 개혁 구상도 일부 공개됐다.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본부급으로 승격해 수석부원장 직속으로 두고, 원장 직속의 ‘금융소비자보호위원회’를 신설하는 방안이다.
이세훈 수석부원장은 “소비자는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감독 서비스를 제공받는 주체”라고 강조했다. 이는 기존 소비자보호 패러다임을 재정의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향후 과제는 만만치 않다. 공공기관 지정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내부 조직 저항과 금융회사·시장과의 갈등도 예상된다. 선언이 제도로, 제도가 실제 집행으로 이어질지가 시험대다.
금감원의 새 항로는 이제 막 출항했다. 방향은 ‘소비자 보호 중심’으로 잡혔지만, 제도와 실행이 이를 뒷받침할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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