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됐지만 대중의 적개심을 사지 않은 '로스차일드 가문'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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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됐지만 대중의 적개심을 사지 않은 '로스차일드 가문' 비법?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10-01 05:16: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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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삽화=최로엡 화백
패러디 삽화=최로엡 화백

 멘델스존과 로스차일드

 그러나 유대인은 다시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나치에 의해 짓밟히 게 된다. 이 시기 유대 계몽주의와는 다르게 유대인의 문제를 해결 하고 그들의 능력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분야는 금융이었다. 바로 세계의 돈을 쥐락펴락했던 그 로스차일드(독일어 이름 로트실트) 가문의 이야기다.

 그에 대해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돈은 우리 시대의 신이며 로스차일드는 신의 예언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좁디좁은 유덴가세Judengasse 출신인 이들은 마이어 암셸의 자식 대에 이르러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부를 일궜다. 런던(나탄), 비엔나(잘로몬), 나폴리(카를), 파리(제임스) 등 네 곳에서 기반을 다졌다. 여기에 프랑크푸르트까지. 이른바 로스차일 드의 ‘다섯 개의 화살’이다.”

  독일 유대인의 의식 해방은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를 해방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0년 초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역인 유덴가세에는 동전, 금속, 골동품 거래인으로 성공한 사업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거주지역 밖에 사업장을 열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덴가세가 나폴레옹군의 포격으로 절반 이상이 파괴된 것이다.

 “1796년 프랑스는 프랑크푸르트를 폭격했고 그 과정에서 유덴 가세의 절반이 파괴됐다. 2,000명가량의 유대인들이 집을 잃어 거주지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족도 그런 형편이었 다. 거주지역을 벗어나면서 수많은 규제 역시 털어낸 로스차일드 가족은 새로운 사업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중략…)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 제일의 부를 축적했다. 전면적인 해방은 181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제스 멘델스존의 새로운 정신과 유럽의 새로운 기풍을 바탕으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은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유대인의 해방은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지배하면서 다른 나라에도 강제적으로 퍼진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게 된 각국 정부는 유대인 자금을 차입하면서 유대인 자본이 권력으로 급성장한다. 이렇게 등장한 가문이 로스차 일드 가문이고 이외에도 멘델스존 가문, 마그누스 가문 등이 19세 기 유대인 금융권력의 중심이 됐다.”

  로스차일드는 유대인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일가가 부를 축적한 과정을 브로드웨이에서 영화로 만들 정도로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 일가의 가장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은행을 경영했다. 후에 네 아들 나탄, 제임스, 잘로몬, 카를을 유럽의 런던, 파리, 빈, 나폴리로 보내 그곳에서 각각 은행을 설립하게 했다. 다섯째 아들 암셸은 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남았다. 형제들이 세운 각자의 은행 제국은 점점 더 커져 갔고 그들의 우애 또한 각별했다. 그들은 긴밀히 서로 협조하며 가장 큰 금융제 국을 건설했다.

  유럽의 유대인은 그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왕족 대접을 받았다. 성공한 사람들이나 졸부들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은 단 한 명도 개종하지 않고 유대사회를 위해서 ‘보이는 의로운 후원자’ 역할을 수행했다.

 나중에 벨푸어 선언을 끌어내어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설립에도 기여했다.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은 왕족으로 남아 있다. 최고의 가문이라는 뜻이다. 다섯 아들과 함께 로스차일드 왕조 를 세운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또한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다.

 “이 전통이 지배하는 작은 세계에도 새 시대를 알리는 계몽의 빛이 스며들었다. 마이어는 유대인에게 희망과 함께 의혹과 두려움도 안겨준 이 진보적 사상에 이끌린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모제스 멘델스존의 제자로 스스로 마스킬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팸플릿과 정기간행물을 만들어 배포하며 그 운동을 펼쳐나갔다. (…중략…) 1792년에 그는 멘델스존이 베를린에 세운 ‘자유학교’ 를 본떠 ‘박애학교’라는 유대인 학교를 세우려 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 내부 보수세력의 반대 에 부딪쳐 1804년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킴으로써 유대인 사회에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었다. 우선 거대한 부를 정직하게 취득하면서 정부의 신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다음 막대한 이윤을 내면서 대중의 적개심을 유발하지 않고 이윤을 잘 활용한다. 마지막으로 법률적, 정신적으로 유대인으로 남는다.

 오늘날에도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정치인의 미움도 사지 않고 대중의 질시도 받지 않고 사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큰 돈을 벌고 자유롭게 사용하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유대인들은 없었다.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쟁, 혁명, 공황의 골짜기를 빠져나오지 못해 역사에서 사라진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로스차일드 가문은 격렬한 사회 변화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며 굳건히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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