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은 전통과 계몽 사이에서 혼종물을 창조했다. 즉 전통에 계몽적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혼종에 머문 유대인도 있지만, 전통 또는 계몽이라는 양극단으로 나아감으로써 혼종을 거부한 유대인도 있었다.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개개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선민사상과 약속의 땅 등 유대교 안에 포함된 사상은 우스꽝스러워서 그런 인식을 갖고 유럽 사회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단으로 몰려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당한 스피노자처 럼 “유대교의 생명을 치명적으로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이방 지식의 샘물을 마실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전통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선민의식, 강한 종교성을 부정하는 멘델스존을 결코 정통성을 가진 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성경』이 권위를 갖는다면 굳이 유대교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멘델스존의 자식들도 대부분 유대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에 대해 하인리히 하이네는 멘델스존을 이렇게 평가했다.
“루터가 교황권을 무너뜨렸듯이 멘델스존은 『탈무드』를 무너뜨렸다. 루터가 전통을 거부하고 『성경』을 종교의 원천으로 선언하고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가톨릭을 산산조 각 낸 것처럼, 그는 유대교를 산산조각 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은 개신교 세계에서 루터가 한 일을 유대교 안에서 했 다. 훗날 유대교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 으로 부화할 ‘위험한 알’을 그가 낳은 것이다.
당시 계몽주의 유대인은 ‘신념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과 품격을 높이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이는 종교적인 게 아니라 세속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종교 지식과 세속 지식이라는 두 가지 지식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지식은 하나뿐이다. 지식을 얻는 목적도 하나뿐이다. 지식은 신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고 신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당연히 문화 적으로 혼란을 일으켰다. 과연 유대교는 삶의 일부인가? 아니면 전 부인가? 멘델스존은 삶의 일부라는 입장이었다. 근대 문화와 타협 하여 계몽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멘델스존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유대교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Haskalah, 히브리어로 ‘지성’이라는 뜻)를 전개했다. 학교 커리큘럼에 세속 과목을 추가했고 유대인이 사용하는 이디시어 대신에 독일어를 사용했다.
하스칼라는 유대인이 독일 등 주변 사회에 융화될 것을 주장했고, 독일어 등 현지 언어, 수학, 과학, 철학 등 세 속적 학문과 경제적 생산양식을 받아들일 것을 장려했다. 1778년 최초 유대인 공공학교(베를린 자유학교)가 설립됐다. 동시에 하스칼 라는 기독교와 유대교 종교학자들이 쌓아온 배타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로 문화를 교류해야 하며 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강조했다. 이 운동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로 번져갔다. 주체세력이 형성되고 공론장(학교, 책자 등)을 통해 확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세기 전반부에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서 수많 은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계몽운동이 낳은 부산물 효과였다.
“계몽운동은 많은 유대인의 종교성을 약화시켰다. ‘계몽된’ 많은 유대인은 더 이상 믿지 않는 종교 때문에 고통당해야 한다는 점을 더 불합리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유대인이 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유대교 전통도 지키면서 훌륭한 근대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반면에 동일한 길을 따 라갔음에도 독일과 동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 중에 약 25만 명은 하이네와 마르크스처럼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독일에서 하인리히 마르크스가 변호사로 일하기 위해 개종했고, 1824년에는 아들 칼 마르크스를 포함한 네 명의 아이를 개종시켰다. 그즈음 아이작 디즈레일리가 아들 벤저민을 영국국교회로 개종시켰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벤저민은 영국 수상이 될 수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명한 유대인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개종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대인에게 세례는 유럽 문화로 들어가는 입장문이다.”
그래서 정통파 유대교는 멘델스존을 극렬히 비난했다. ‘계몽운동은 동화의 첫걸음’이며 ‘세속과 결합한 순간 유대교는 멸망할 것’이라는 증거로 멘델스존 자녀들의 기독교 개종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멘델스존을 비난할 수 없었다. 유대교의 선민 사상이나 메시아주의라는 종교성을 유지한 채 세속에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일반 학문과 지식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정리하면, 독일 유대인 사회는 유대인 멘델스존을 통해 인식 혁명이 일어났다. 고루한 인식을 깨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일단 속박에서 벗어난 유대인은 학문, 문화, 산업 분야에서 두각 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초의 현대 독일 유대인인 멘델스존은 하스칼라의 상징적 인물로 빛이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는 마르크스 같은 인물에게 유대교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상까지 열어주었다. 멘델스존이 죽었을 때 유대인 공동체 전부가 그의 뒤를 따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자 마르크스는 멘델스존의 주장을 ‘물탱이, 술에 물탄 듯’ 이라며 혹평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달라졌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가 예비한 길을 따라 걸었기에 가능한 주장이었다. 마르크스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1세기 뒤 1881년 러시아에서 유대인 을 탄압하고 유대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유대 계몽주의’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멘델스존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수많은 유대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게토에서 해방된 유대인은 철학, 과학, 언론, 금 융,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천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본론』을 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원자력 시대를 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무의식의 발견으로 인간 심리를 해석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인터넷·스마트폰·나노과학의 문을 활짝 연 존 폰 노이만, 비료를 발명한 프리츠 하버, 독일 최고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비롯 해 프란츠 카프카, 프리모 레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페기 구겐하임, 레온 트로츠키, 조지 소로스, 자크 아탈리, 토머스 프리드먼, 조지프 퓰리처, 앙드레 시트로앵, 구스타프 말러, 조지거 슈윈, 레너드 번스타인 등 수많은 별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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