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소설 판매 작년보다 23.4%↑…도서전·북토크도 인기
"한강 수상이 활기 불어넣어"…다양성 확대·독서율 제고는 숙제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던 지난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한 젊은 여성이 이어폰을 끼고 '한국소설' 매대에서 책을 들춰보고 있었다. 2013년 출간된 양귀자 소설 '천년의 사랑'이었다. 대학생 염선민(23) 씨는 양귀자의 팬이라며 앞서 소설 '모순'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모두 읽고 '천년의 사랑'을 읽으려 한다고 했다. "문체가 제 스타일이어서요."
염씨는 "원래 해외 소설을 주로 읽었는데 '모순'을 읽고서 한국소설에 관심이 커졌다"며 "외국 소설은 읽고 나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데 한국소설은 즉시 이해할 수 있어서 좋다. 요즘은 한국소설 중심으로 읽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반반 정도 된다"며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염씨 외에도 이날 빗속을 뚫고 한국소설 매대에서 서성이는 독자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여성이었으며 젊은층과 중년, 교복을 입은 10대가 뒤섞여 있었다.
소설 장르가 인기다. 베스트셀러 차트를 소설이 석권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읽은 소설을 인증하는 사진들이 잇따른다. 소설가들은 북토크와 도서전에서 많은 팬을 몰고 다닌다. 바야흐로 소설의 시대다.
기폭제가 된 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수상 후 근 1년 동안 한강은 소설의 인기에 마중물을 놓은 것은 물론, 독서문화 증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 한강이 쏘아 올린 소설의 힘…출판계 '활황'
15년째 교보문고에서 베스트셀러를 담당한 김현정 과장은 "올해만큼 한국의 순문학이 인기를 끈 해도 없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예전에는 판타지 문학이나 일본 문학이 유행해 판매가 올라간 적이 있었지만, 문학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순문학 장르가 대형서점 매대를 장악하고, 독자들을 끌어모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인기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28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유통통합전산망 통계에 따르면 올해 1~8월 소설 판매량은 564만권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57만권)에 견줘 23.4% 늘었다. 2024년(1~8월) 소설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1% 증가한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이라 할만하다. 이 같은 인기 속에 전체 책 판매 중 소설 비중도 지난해 6.4%에서 올해 7.9% 수준으로 올라갔다.
베스트셀러에서 소설 주목도도 커졌다.
올해 교보문고 상반기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양귀자 '모순'(3위), 한강 '채식주의자'(5위), 정대건 '급류'(6위),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7위) 등 5편이 10위 안에 들었다. 지난 7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최상위권도 모두 한국 소설이 차지했다. 성해나 소설집 '혼모노'가 1위, 김애란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가 2위, 양귀자 장편 '모순'이 3위였다.
◇ 도서전 매진 사례, 북토크 등도 성황
소설의 인기는 서점을 넘어 도서전, 북토크 등으로 확산했다.
가령, 지난 6월 15만명을 모으며 역대 최다 관람객을 경신한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소설 장르가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김애란, 정보라, 김주혜, 김금희, 조예은, 최진영 등이 진행한 북토크는 전부 매진됐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등 문학 중심 출판사들의 부스도 인기를 끌었다. 이들 출판사 부스에서 계산하려면 최소 30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흔했다.
도서전뿐 아니라 서점가에서 펼쳐지는 북토크도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새로운 독자들이 유입되면서 한국문학과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분석했다.
소설가 김금희는 "북토크에서 '처음 소설을 읽어본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어본다'는 독자들을 그 어느 해보다 많이 만났다"며 "새로운 한국문학 독자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한강 선생님 수상이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보고 문학이 새로운 세대에게 향유할 만한 문화적 매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곁들였다.
또한 물리학과 천문학을 소설에 녹인 김초엽, 호러와 스릴러로 주목받은 조예은, 영화 GV(관객과의 대화)와 무속의 세계 등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젊은 세대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떠오른 성해나 등 당대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팬덤이 형성된 측면도 소설 인기에 한몫했다.
전수용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한 작가에게 주목이 집중되는 현상 자체보다는 그 작가를 매개로 새로운 독자가 문학에 진입하는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는 문학계 전체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소설가 김기창은 "각종 도서전의 열기를 보면 소설을 포함해 문학 작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 같긴 하다"며 "이런 분위기를 잘 살려 새로운 문학 독자를 형성하고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 "새로운 작품 꾸준히 나와야"…독서율 높이는 건 숙제
한강의 작품과 신진 작가들이 팬덤을 형성하며 소설이 약진하고 있지만, 노벨상을 넘어 한국문학이 미국·영국이나 프랑스 문학처럼 세계 주류로 도약하기 위해선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광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소설 분야에 대한 관심은 커졌지만, 여전히 한국문학 시장은 좁고 다양성이 부족하며 (특정 작가와 장르) 쏠림 현상이 있다"며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좀 더 다양한 문학에 대한 관심과 문학 시장 전체로 확대되기에는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새로운 한국 작가들이 동시대의 세계 독자와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형철 평론가도 "전체적으로 소설 시장이 여성에 편중된 경향이 있다"며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남성 독자가 늘고, 이들을 견인할 남성 작가가 다수 등장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독서율을 높이는 것도 숙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 주기로 행하는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9월부터 2023년 8월까지 성인 중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종합독서율)은 43%에 그쳤다. 종합독서율은 1994년 86.8%에 달했지만, 스마트폰 앱 사용이 일반화하고 전자책이 통계에 포함된 2013년(72.3%) 이래로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수용 번역원장은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양질의 콘텐츠 생산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고, 읽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 있는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자연스럽게 독서율도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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