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호수에서 뱃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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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칼럼] 호수에서 뱃길로

문화매거진 2025-09-26 17:09: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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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촌 호수 풍경 / 그림: 정혜원
▲ 석촌 호수 풍경 / 그림: 정혜원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사주에 큰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연말연시에 무료 사주 풀이 링크를 발견하고 재미 삼아 본 적은 있었다. 사주를 공부한다는 친구에게 간단한 풀이를 부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았고, 한 번도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작년, 되는 일이 하도 없어서 처음으로 사주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용하다는 사주가를 찾게 되었다. 그의 풀이 가운데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나는 사방의 어둠을 밝히는 불이며,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 그 후로 ‘나=불’이라는 등식이 단단히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힘이 들 때면 떠올린다. 온 어둠을 환히 밝히고, 역경을 활활 불사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사주와 더 가까워진 계기는 챗GPT다. 공부와 일 때문에 생활 속에 도입했던 챗GPT가 의외로 제법 괜찮은 상담사일 뿐만 아니라, 사주도 그럴듯하게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미 일상의 시시콜콜한 사건들을 털어놓은 뒤라 새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태어난 일시만 알려 주었을 뿐인데 내 사주팔자를 줄줄 읊어 주었다. 지난 대화 이력을 토대로 풀어낸 사주는 정말이지 내게 꼭 들어맞는 듯했다.

챗GPT가 해 주는 사주 풀이는 정확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풀이의 정확성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위로가 되었으니까. 마치 정신과 상담의 또 다른 형태 같았다. 낯선 사주가에게는 털어놓기 힘든 일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어 주고, 앞으로의 흐름과 방향성, 가능성 같은 것을 살뜰히 귀띔해 주었다. 직장을 그만둘지 말지, 이사를 언제 어디로 할지, 주변 사람과 어떻게 지낼지 등등.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사주를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사주에 흙이 지나치게 많아 불이 눌리는 팔자였다. 그렇다면 왜 사주가는 나를 불이라고 했을까. 챗GPT에 따르면 아마 스스로가 불이 되어 약한 불기운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미였을 거라고 한다. 사주팔자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도 나는 이 약간 억지스러운 풀이가 마음에 든다. 그 한마디가 내게 불을 붙였고, 덕분에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었다.

한편, 내 사주에서는 물이 중요하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흙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데, 올해 나는 우연치 않게 계속 물가를 맴돌고 있다. 어렵게 취직에 성공했는데 직장이 마침 석촌 호수 근처였다. 그래서 퇴근하면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매일 산책을 하러 석촌 호수로 향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크록스를 신고 우산을 쓴 채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더 걷고 싶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듯한 직장 생활 속에서 내 유일한 낙이었다. 석촌 호수가 없었다면 그 시간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고 말았다. 직장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지만, 석촌 호수를 떠나는 것만은 아쉬웠다. 퇴사 후 송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는 일주일 동안, 처음으로 직장에 대한 근심 걱정 없이 여유롭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호숫길을 걸었다. 그렇게 호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갈무리했다.

송파를 떠나 다시 인천으로 왔다. 이곳도 물가다. 아라뱃길이 지나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석촌 호수와 비슷한 산책길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왔다. 아라뱃길에는 한강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가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송파와 이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석촌 호수와는 사뭇 다르게 한산한 이 산책길에 어서 정을 붙이고 싶다. 다만 볕 좋은 날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제법 있지만, 너무 늦은 시각에는 인적이 끊겨 버린다. 살짝 무섭기에 대낮에만 산책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나는 내 몸을 연료 삼아 불꽃을 활활 태울 것이다. 다시 번역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40대를 맞아 앞으로도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2년 가까이 불안에 떨며 취준도 하고 취직도 했다. 당장 시도할 만한 것은 원 없이 다 해 봤다. 이제야 겨우 불안이 잦아들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이지만 내겐 맞지 않음을 몸소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 발버둥을 치느라 지쳐서일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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