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간 무역·관세 협상이 다시금 거센 파고를 맞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3500억 달러(약 490조원) 대미 투자 약정을 “선불(up front)"이라고 공개 발언한 데 이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투자 규모 증액과 현금 지급 방식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장치로서 통화스와프 체결이 필수적이라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비자 문제까지 겹치며 협상은 정치·경제·외교 전반을 흔드는 ‘3중 난제’로 번지고 있다.
▲트럼프의 무리한 ‘선불 요구’와 러트닉의 도 넘은 증액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한국과 일본의 투자 약정을 언급하며 “우리는 일본에서 5500억 달러, 한국에서 3500억 달러를 각각 받는다. 그것들은 선불”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투자 약정이 아닌 즉각적인 현금 집행을 전제로 하는 발언으로, 시장과 외교당국 모두에 충격을 주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트닉 장관이 최근 한국 측에 3,500억 달러 투자 규모를 소폭 증액해 일본의 5,500억 달러에 더 근접시키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또한 “투자의 상당 부분은 대출이 아닌 현금으로 제공돼야 한다”는 점을 비공개적으로 전달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식 모델을 한국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겠다는 압박이다.
앞서 미·일 양국은 자동차와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일본이 미국에 5,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하는 합의를 했다. 특히 원금 회수 후 투자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조건이 포함됐다. 이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아닌 양해각서(MOU) 형식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행정명령으로 관세 인하를 확정하며 사실상 정치적 구속력을 가진 상태다.
▲벼랑 끝 내몰린 韓 정부 “통화스와프 없이는 외환위기 불가피”
한국 정부는 투자 이행 조건과 방식에 대해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 달러를 현금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이라며, 외환시장 충격을 완화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협상 진전이 어렵다고 못박았다. 한국 정부는 지분투자를 최소화하고 보증·융자 중심의 패키지를 선호하는 반면, 미국은 현금 지분투자를 요구하고 있어 접점을 찾기 쉽지 않다.
3,500억 달러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따라서 단순 현금 집행은 원화 가치 급락과 외환시장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통화스와프가 체결되지 않는 한 미국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
최근 외환시장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지는 1400원을 넘어서면서 이같은 우려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비자 문제로 투자 프로젝트 불확실성 커져
협상 난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25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진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한국 근로자 수백 명이 이민 당국 단속에 걸린 사례는 투자 프로젝트 진행의 리스크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 총리는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중단된 것은 아니지만, 신규 인력의 미국 입국이나 재입국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 투자 약정의 실행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로 인해 3,500억 달러 투자 패키지에도 불확실성이 드리워지고 있다.
뉴욕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의 면담은 협상 국면의 또 다른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이 대통령은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되는 협의가 필요하다”며 통화스와프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에 베센트 장관은 “관련 부처와 논의하겠다”고 답하며 일정 수준의 유연성을 보였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이번 접견을 두고 “3500억 달러 투자 패키지 협상 과정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구체적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타협점, ‘일본식 모델’과 ‘한국식 모델’ 사이 어디쯤
현재 협상은 △투자 규모 및 방식, △통화스와프 체결 여부, △비자 문제라는 세 가지 핵심 쟁점으로 요약된다. 미국은 일본식 모델을 근거로 한국에 압박을 강화하고 있으며, 한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경제상황과 그에 따른 리스크를 근거로 상업적 합리성을 내세우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번 협상은 단순히 관세 인하를 둘러싼 문제를 넘어 외환 안정·투자 보장·노동 이동성 등 한미 경제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메가딜’ 성격으로 진화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이 미국 요구를 전면 수용하기는 어려운 만큼, ‘한국식 모델’을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가 협상의 성패를 가를 관건이다.
다만, 일본은 협상 카드가 사실상 없었던 반면, 한국은 조선·반도체·원전·배터리 등 미국이 가장 절실한 제조업 분야에서 강점이 있어 협상 가능성은 낮지 않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