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임나래 기자] 국내 사모펀드(PEF)가 사상 최대 규모로 커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PEF 수는 1137개, 집행액은 117조5000억원에 달한다. 금리 인하 기대감이 커지면서 인수금융 조달 여건이 개선되고 대체투자 수요가 늘어난 덕분이다. 그러나 단기 차익 추구와 과도한 레버리지 관행은 여전하다. 인수된 기업이 빚 상환에 매달리면서 부담은 근로자·협력사·지역사회로 전가된다. 재건·성장 자본이라는 명분을 실질로 만들 제도 장치 없이는 사모펀드의 번영이 결국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오고 있다.
◇빚으로 사들이고, 기업이 갚는 구조
PEF는 기업을 인수할 때 자기자본보다 차입금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인수자금의 상당 부분을 은행 대출 등으로 마련하지만 원리금 상환 주체는 펀드가 아니라 피인수 기업이다.
한 대형 증권사 투자은행(IB) 본부장은 “인수 직후 기업이 감당해야 할 연간 이자만 수백억 원에 이른다. 펀드는 투자자 수익을 확보하고, 기업은 사실상 현금 인출기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익은 운용사와 금융권이 먼저 챙기고, 기업 가치 제고는 단기 수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PEF 제도는 아직 성숙 단계가 아니어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규제 보완과 경험 축적을 통해 개선될 여지가 크다”며 “현행 제도상 PEF는 투자·고용 의무가 강하게 부과되지 않지만 이는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즉, ‘단기 차익 위주의 구조는 위험이지만, 제도 설계와 시장 학습이 병행되면 기업 성장과 투자 활성화라는 긍정적 역할로 전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왜 매각시장은 PEF 천하가 됐나
기업 매각시장에서 전략적 투자자(SI)가 아닌 PEF가 주도권을 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대기업은 독과점 심사 등 규제 장벽에 가로막혀 매물 접근이 쉽지 않고, SI는 자금 여력과 사업 시너지 한계 탓에 대규모 거래를 주저한다.
한 증권사 M&A 담당 임원은 “대기업은 규제 리스크, SI는 자금 부담에 막히면서 결국 신속한 결단과 자금 조달력을 앞세운 PEF만 남는다”고 말했다.
컨설팅사 PwC 조사에 따르면 국내 중견·중소기업의 매각 거래 중 약 64%가 PEF를 상대자로 선택했다. 전략적 투자자는 절반에도 못 미쳤다. 2015년 홈플러스가 유통 대기업이 아닌 사모펀드에 인수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소수 자본의 실험, 다수 사회의 부담
PEF는 “위험은 소수 전문투자자가 부담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제도화됐다. 그러나 실제 피해는 훨씬 넓다.
한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고용 안정 장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지분이 손바뀌면 근로자는 예고 없이 일자리를 잃는다”며 “그 파급은 협력사와 지역 경제로까지 번진다”고 분석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홈플러스는 MBK파트너스 인수 후 10년간 직·간접 고용이 인수 전 대비 약 40% 줄었다. 운용사가 법인을 내세워 책임을 회사 자본금만큼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손실은 결국 지역사회가 떠안게 된다.
앞서 증권사 관계자가 지적했듯, 시장의 자율만으로는 단기 차익 추구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최소한의 ‘투자 지속성 확보 장치’를 마련해 고용과 재투자 책임을 제도적으로 담보해야 PEF가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시각이 힘을 얻는다.
◇책임 묻는 제도, 신뢰받는 자본의 시작
단순 규제 강화만으로는 약탈적 구조를 막기 어렵다는 지적이 증권가에서 나온다. 필요한 것은 ‘운용사 책임을 실질화’하는 제도 장치다.
운용사의 자기자본 출자 비율을 높이고, 기업 구조조정 시 고용·투자 영향 보고서를 의무화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국내 한 대형 증권사 정책분석 책임자는 “단순 규제로는 펀드의 구조적 약탈을 막기 어렵다”며 “운용사 책임을 실질화하고, 공적 자본이 일부 구조조정 시장을 맡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 재건금융공사(KfW), 일본 산업혁신기구처럼 공적 자본이 민간 PEF와 함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방식이 대안으로 꼽힌다.
한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는 “사모펀드는 성장·재건 자본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차입을 통한 단기 수익 모델은 기업과 지역사회에 부담을 전가한다”고 지적했다.
복수의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운용사의 책임을 실질화하고 공적 자본이 보완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만 ‘약탈적 사모펀드’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궁극적으로는 규제 보완과 경험 축적을 통해 PEF 제도가 성숙 단계로 나아가고, 시장 자율과 최소한의 지속성 장치가 결합될 때 비로소 ‘신뢰받는 자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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