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국내 제약회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 사이의 약가 협상이 최근 7년 사이 가장 자주 결렬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신약과 항암제 관련 협상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환자들이 적기에 치료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고, 협상 제도를 빠르게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미애 의원이 건보공단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9년부터 올해 8월까지 약가 협상은 모두 1,863건 진행됐고 이 중 56건, 즉 3%가 결렬됐다.
특히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179건 협상 중 10건이 결렬돼, 결렬률이 5.6%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2.0%)나 재작년(1.9%)과 비교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수치로, 최근 7년간 최고다.
유형별로 보면 '사용량‑약가 연동' 방식이 1,280건으로 가장 많았고 △신약 협상 161건(9건 결렬, 5.6%) △예상청구금액 방식 146건(1건 결렬, 0.7%) △약가 인상 조정 181건(15건 결렬, 8.3%) △급여 범위 확대 95건(8건 결렬, 8.4%) 순이었다.
협상에서 결렬된 사례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혁신 신약이나 고가 항암제다. 예를 들어 한국릴리의 레테브모주(RET 억제제)는 지난해 8월 예상청구금액을 둘러싸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협상이 끝나, 여전히 건강보험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코오롱제약의 코슈엘정(항히스타민제)은 아예 생산이 어려워져 협상 자체가 무산된 경우다.
하지만 희망적인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화이자의 로비큐아정은 지난해 5월 협상이 결렬됐다가 올해 3월에 재협상 끝에 계약을 체결했고, JW중외제약의 페린젝트주 역시 2021년 2월 협상 결렬 후 3년 만에 타결됐다.
이처럼 협상이 자주 무산되면 고가 약제는 보험 적용이 늦어지거나 아예 되지 못해 환자가 큰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처럼 대체할 수 있는 약이 한정적인 경우, 협상 결렬은 환자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요양급여비용 협상은 매년 5월 말까지 끝내야 하고, 협상이 안 될 경우 6월 말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의결을 받아 금액을 고시하게 돼 있다. 김미애 의원은 이런 절차를 활용해 협상 지연 시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미애 의원은 "약가 협상은 건강보험 재정과 환자 치료 기회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요한 과정"이라며 "특히 고가 항암제나 혁신 신약의 경우 환자의 치료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협상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건보공단과 보건복지부는 협상 중재 강화, 제도적 유연성 확대 등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재정 압박, 제약사와의 이해관계 등 복잡한 문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다.
한 예로, 노바티스의 아피니토 약가 인하 요구가 30% 가까이 제시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건강보험공단이 지나치게 높은 인하율을 요구해 오히려 협상이 결렬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보험재정 부담도 중요한 과제다. 건보공단은 그동안 '사용량‑약가 연동' 제도를 활용해 약제비 증가를 조절해왔고, 실제로 134개 품목의 약가를 낮춰 연간 281억 원의 재정 절감 효과를 거둔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재정 절감 위주의 접근이 오히려 혁신 신약이나 최신 치료제의 도입을 막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결국 건강보험 재정과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모두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정책이 필요하다.
결국 최근 약가 협상 결렬률의 급증은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라, 치료 기회의 지연과 환자의 부담 증가라는 심각한 신호다. 앞으로 정부와 관련 기관이 어떤 방향으로 대처할지, 국민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정해진 기간 안에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제3자 중재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이뤄지도록 제도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현재보다 더 넓은 역할을 맡겨, 협상 과정 전반에 활발히 참여하도록 해야한다.
제약회사와 공단이 각각 제시한 요구안과 안건을 공개해, 모든 절차가 투명하게 이뤄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해관계 충돌이 없도록 감시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과에 따라 약가를 조정하는 제도나 위험을 나누는 방식의 약가 구조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초기 비용과 위험을 줄여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조건부 급여나 제한적으로 보험을 적용하는 모델을 확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가 치료제를 사용할 때 환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 만약 치료가 지연될 경우를 대비해 대체 약제 제공이나 금융 지원 역시 필요하다.
한편 의료 전문가와 제약업계, 그리고 정부가 긴밀하게 소통하며 정책을 바꿔가지 않는다면, 협상 결렬이 잦아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결국 환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치료가 시급한 환자일수록 빠른 치료가 절실하다. '협상의 늪'에 빠진 환자들이 외면당하지 않도록, 약가 협상 체계를 근본적으로 보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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