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협상할 때 상대측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세계 최대 시장이자 최강국이잖아요. 결국 우리가 따라가야죠.” 하지만 현대 협상 이론의 원조격인 하버드 PON(Program on Negotiation)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협상 성공의 7요소 중 하나인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협상 결렬 시의 최선 대안)에 따르면 협상력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협상이 결렬될 경우 얼마나 현실적이고 실행 가능한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로 결정된다.
이 관점은 적대적인 힘 겨루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의존하는 파트너 사이일수록 서로의 제약과 대안을 이해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서로 만족하는 협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미국과의 협상에서 일본과 인도의 행보는 대조적이다. 일본은 비교적 일찍 미국과 협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자동차 등 일부 품목의 관세가 15%로 조정됐지만 여전히 기존 세율보다 높아 국내 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 투자금 사용처와 수익 배분에 있어서도 일방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반면 인도는 ‘전략적 자율성’을 내세우며 미국의 시장 개방·관세 요구에 신중히 대응했다.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지속하고 농업·유제품 개방에도 소극적이었으며 미국의 최대 50% 보복관세에도 공급망 다변화(BATNA 강화)로 버텨 왔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모디 총리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통화를 나눈 뒤 양국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역당국은 협상을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positive & forward-looking)이라 표현했고 미국의 관세 완화 가능성도 거론된다. 인도가 유지한 기조가 결국 협상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이들의 행보에서 한국 역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9월 조지아주 현대·LG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이 대규모 단속을 벌여 수백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을 연행했다. 약 76억달러 규모의 투자, 수천개의 일자리가 걸린 프로젝트였기에 미국 내에서도 “외국기업 투자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비판이 나왔다. 협상 결렬의 대가가 미국에도 크다는 점이 드러난 장면이다.
또 미국은 최근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라는 이름으로 자국 조선업 재건 구상을 추진 중이다. 한국은 세계적 기술력과 숙련 인력을 기반으로 미국 내 조선소 현대화, 정비(MRO), 인력 양성, 부품 공급망 구축 등을 패키지로 제안했다.
이 협력은 어느 한쪽의 승리를 위한 게임이 아니다. 미국은 숙련 인력과 부품 공급망을, 한국은 안정적 투자 환경과 예측 가능한 제도(비자 등)를 필요로 한다. 서로의 BATNA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의 이익 (Interests) 역시 존중하는 협의에 이를 수 있다.
한국은 흔히 미국과의 협상에서 ‘약자’라는 전제를 깔고 출발한다. 그러나 일본과 인도의 상반된 행보, 그리고 조지아와 MASGA 사례가 보여주듯 미국도 결코 무한한 대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과 투자 역량은 미국에도 꼭 필요한 카드다.
따라서 한국은 BATNA를 포함한 요소들을 두루 고려한 총체적 전략을 세워 보다 유연하고 여유롭게 협상 테이블에 임할 수 있다. 협상력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준비된 대안에서 나오며 상대와 나의 BATNA를 정확히 이해할 때 대등한 파트너십이 가능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협상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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