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에서 열린 ‘경제활동 보호와 법질서 확립을 위한 경제형벌 제도의 혁신과 과제’ 세미나 1세션에서 경제계와 학계 전문가들이 현행 경제형벌 체계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지적하며 합리화 방안을 제시했다.
배상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발제를 통해 경제형벌 합리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가운데, 토론자들은 기업 현장의 실상과 개선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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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공화국 현실…기업 위축 심각”
토론에 나선 김준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 기업제도팀장은 “5886개의 경제형벌 규정이 우리 경제가 얼마나 촘촘한 형벌의 그물에 갇혀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기업 현장의 절박함을 전했다.
그는 이어 “한국경제인협회 2021년 조사에 따르면 301개 경제 법률에서 무려 6568개의 형사처벌 항목이 발견됐고, 이 중 92%가 개인과 법인을 함께 처벌하는 양벌 규정”이라며 “전체 처벌 항목의 36.2%가 징역·벌금 외에 과징금, 과태료 등을 병과하는 중복 처벌이었고, 심지어 5중 처벌까지 존재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 사례로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현장 진입을 30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기업과 임원이 고발당하는 일 △하도급법상 공사대금 지급 보증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도급 대금의 2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 등을 제시했다.
김 팀장은 특히 “외부감사법상 회계 처리 기준 위반 시 그 형량이 살인죄와 유사한 수준인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며 “과연 이러한 행정 절차상의 이슈들이 기업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징역형 등의 과도한 처벌로 다스려야 할 만큼 중대한 범죄인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배임죄 기소율, 한국이 일본의 31배
김 팀장은 배임죄 문제도 집중 조명했다. 그는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배임죄로 기소된 인원이 한국은 일본의 31배에 달한다”며 “한국에서 연평균 965명이 배임죄로 기소될 때 일본은 고작 31명만 기소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5년간 동결된 특경법의 배임죄 기준이 시대착오적”이라며 “1989년에 만들어진 50억원 이상 기준이 아직도 적용돼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이라는 사실상 살인죄와 유사한 수준의 형벌이 경영 실패에 가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배임·횡령죄의 무죄율이 전체 형사 사건 평균의 2배가 넘는 6.7%에 달한다는 사실은 기소 자체가 무리였음을 방증한다”며 “올해 7월 대법원에서 배임죄 무죄 선고를 받은 모 대기업 회장은 약 5년간 185차례나 법정에 출석했는데, 결국 무죄로 끝났지만 수사와 기소·소송만으로도 큰 형벌이 됐다”고 지적했다.
◇“준법경영 면책 확대해야”
김 팀장은 개선방안으로 “충실한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실효적으로 운용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과감하게 처벌을 면제하거나 감경해주는 준법 노력 면책, 즉 세이프 하버 제도(Safe Harbor Rule·일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추가적인 책임 추궁이나 불이익을 면제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의미)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며 준법경영 면책 확대를 제안했다.
그는 미국 사례를 들어 “미국 연방 양형 기준은 1990년대부터 실효적 준법 및 윤리 프로그램을 운영한 기업에 벌금을 포함한 형량을 대폭 감경해주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기업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영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준법 시스템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학계 “민사구제 강화 병행돼야”
손창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토론에서 “경제형벌 합리화는 기업 활동 촉진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시급히 추진돼야 한다”면서도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은행 조사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 4~5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업하기 좋은 인프라는 잘 돼 있지만 사전 규제로 인한 기업인들의 부담감이 상당하다”며 “사전 규제를 사후 규제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다만 “형사 제재를 행정 제재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행정적 사전 규제를 더 증설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행정 역량은 한정된 자원인데 행정 규제를 마냥 늘린다고 해서 실효적으로 발동한다는 보장이 없고, 오히려 선택적 규제나 규제 포획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손 교수는 특히 민사구제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주주대표소송이 도입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많이 활용되지 못하고 있고, 2020년에 도입된 이중대표소송도 제기됐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대표소송 제기에 인센티브가 부족하고 입증 책임 부담이 크기 때문에 결국 주주나 이해관계자들이 배임죄 고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배임죄 개선 문제가 논의된다면 이를 단독적인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되고, 민사적 해결책이 충분히 정비되지 않아서 배임죄로 몰려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있는 범죄는 신중 접근”
손 교수는 경제형벌 개선 시 고려사항도 제시했다. 그는 “경제형벌 중에는 피해자가 있는 범죄와 없는 범죄가 있는데, 피해자가 있는 범죄를 비범죄화할 경우에는 피해자 구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사전에 선행돼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단순 절차 규정 위반의 경우에는 비범죄화가 타당하지만, 게이트키퍼 역할을 할 수 있는 절차 규정의 경우에는 비범죄화에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실체 규정 위반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근우 가천대 법과대학 교수도 “‘과태료로 바꾸자, 행정제재로 바꾸자’고 하는데 사실상 행정제재의 수단이 불분명하다”며 “간접 강제가 형벌만큼 철저한 사실 조사가 가능한가, 수사권과 행정조사권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런 불충분함 때문에 더 형벌을 선호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30% 개선 목표, 이번엔 실질적 변화 기대”
1세션 좌장을 맡은 윤지영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형사법제연구실장은 “앞서 2021년도 경제형벌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유관 부처들이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법률의 형벌 규정이 힘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정비하는 거에 대해서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며 “이번에는 정부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정비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정부가 경제형벌 합리화 태스크포스(TF)를 통해 1년 내 30% 개선을 목표로 한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지난 정부의 경제형벌 개선과제 입법률이 13.2%에 그쳤다는 점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국회의 적극적인 협조와 경제계와의 소통을 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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