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제약업계가 ESG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폐기 의약품’ 관리 영역은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다. 의약품은 정해진 기간 내 처방 용량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낮은 복약 순응도와 과잉 공급, 유효기간 경과 등으로 상당한 양이 불용의약품으로 전환되고 있다. 해외가 사용하지 않은 약을 재분배하거나 제약사에 회수 책임을 부과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과 달리 한국은 홍보·수거 수준에 머물러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약국·보건소를 통한 폐의약품 수거량은 2022년 48만7000㎏에서 2023년 71만3000㎏으로 급증했다. 생활계 유해폐기물로 분류되는 폐의약품은 단순히 환경오염 우려를 넘어 건강보험 재정과 환자 본인부담으로 이어진다. 복용하지 않고 버려지는 약이 결국 재정 누수를 유발하고, 비용 부담이 환자에게 전가되는 구조다.
정부는 폐의약품의 안전한 수거를 위해 지자체와 대한약사회 중심의 회수 체계를 운영 중이다. 각 지자체는 폐의약품을 보건소와 약국을 거점으로 모아 전문 처리업체에 위탁한다. 반면, 제약사는 별도 회수·처리 비용 부담 의무나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의약품 유통·생산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기업이 비용 부담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공백이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일부 제약사는 제형 개선을 통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연질캡슐 전문업체 알피바이오는 자체 기술인 ‘뉴네오젤’과 ‘뉴네오솔’을 적용해 연질캡슐의 유통기한을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감기약·진통제 등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에 확대 적용해 사용 기간을 늘리고, 불필요한 폐기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유한양행과 동국제약 등 일부 제약사들도 소포장 단위 출시나 맞춤형 공급 모델을 도입해 불필요한 의약품 처방과 폐기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소포장은 포장 단위를 줄이면 복용 중단이나 과잉 처방으로 인한 폐기량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소포장 확대에는 비용 부담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따른다. 기존 생산라인을 조정해야 하고 포장 단가 상승으로 제품 원가가 높아진다. 물류·유통 과정에서도 관리 비용이 늘어나 단기적으로는 수익성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아직은 제한적으로만 운영되고 있어 보편적 확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에서는 ‘약사법’이나 ‘폐기물관리법’ 등에 따라 안전성 문제를 이유로 사용하지 않은 의약품의 재사용이나 재분배가 전면 금지돼 있다. 유효 성분이 남아 있더라도 개봉된 제품은 변질이나 오염 가능성이 있어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현행 법체계에는 제약사에 회수·재활용 의무를 직접 부과하는 조항이 없어 제도적 대응에도 한계가 있다.
반면 해외는 제약사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의약품 지침’과 각국의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 제도를 통해 제약사와 유통업계에 회수·처리 의무를 부과, 그 비용을 일부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애리조나·아이오와 등 일부 주에서 ‘처방 약 기부·재분배 프로그램(Drug Repository Program)’을 운영해 미개봉·유효기간 내 약품을 저소득층 환자에게 재공급한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제약사가 무료로 폐의약품 반환·회수 설비를 제공하고 매년 운영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EPR 법에 따라 사용 후 발생하는 의약품 폐기물을 제약사가 처리하도록 규정한다.
프랑스도 2007년부터 모든 약국이 제약사 회수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참여, 소비자가 반환한 폐의약품을 약사가 선별해 도매업체에 보관 후 소각한다. 위반 시 약사나 제조업자에게 벌칙이 부과된다. 비용 역시 제약사와 정부가 공동 분담하거나, 프랑스·캐나다처럼 제약사가 단독 부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폐기 의약품 관리’를 ESG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생산과 유통은 제약사가 주도하지만, 폐기 비용은 환자와 건강보험 재정에 전가되는 구조적 불균형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약효 안전성은 중요하지만, 제약사의 회수 책임을 최소한의 수준으로라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환경 보고서와 지속가능성 지표에서 폐의약품 관리 항목은 아직 공시되지 않고 있다. 주요 제약사 ESG 보고서가 온실가스·에너지·수자원·일반 폐기물에 집중된 것과 달리 사용 후 의약품 처리 문제는 빠져 있는 셈이다. 이 공백이 지속될 경우 공시의 완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 글로벌 투자자들이 중시하는 환경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도 한국 제약업계의 경쟁력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결국 해법은 비용과 책임의 합리적 분담에 있다”며 “제약사가 일정 부분 회수 비용을 부담하고, 정부는 안전성 검증 체계를 정비하며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반납에 참여하는 삼각 협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처럼 수거와 홍보에 머무른 구조로는 폐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줄이기 어렵다”며 “제약사 역시 단순 회수에 그칠 게 아니라 소포장 확대나 제형 개선 등 기술 개발을 통한 사전적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