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대인 사회에 출현한 창조적 소수자
당시 18세기 중반 유럽은 종교개혁 이래 끝없는 혼란과 개혁에 맞닥뜨린 격동의 시대로 역사가는 이때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부 른다. 계몽주의 시대를 맞아 게토에 갇힌 가난한 유대인과 달리 지식과 재산이 충분한 소수의 유대인은 살롱에 모여 철학, 문학, 예술을 토론하는 일명 ‘살롱 유대인’이 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의 주류사회에 진입했다. 이들 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두 가지 길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만일 이대로 게토에 주저앉아 버리면 유대인은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계몽주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작정 게토에서 나온다면 기독교 세력에 잠식당할 위험이 있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에서 최대 위기 상황이었다. 슬럼화된 게토에 초라한 존재로 계속 남아 있느냐? 아니면 게토를 떠나 기독교 사회로 완전히 동화되어 유대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느냐?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 인물이 나타나 홀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유대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출애굽기』의 영웅인 모세와 같은 이름의 사내였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앞날을 개척한 존재였다. 바로 유대 근대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계몽주의 철 학가인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이다. 유명한 「결혼행진곡」을 작곡한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모제스는 등이 굽은 척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연극 연출가라면 유대인 문화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연극의 주역으로 게토의 보기 흉한 곱사등이 사내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역사는 그를 택했다. 그는 모제스 멘델스존으로 데사우의 게토에서 태어난 곱사등이었다.”
멘델스존은 14세 때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다양한 유럽 언어를 습득하고 볼테르와 루소의 영향을 받아 모든 전통주의 사고에 반대 하는 계몽주의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 후 그는 직물업에서 크게 성 공한 후 수많은 독일 지성들과 어울리면서 독일 상류사회의 명사가 된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도 우정을 쌓았고 작센의 목사의 아들인 동갑내기 극작가 고트홀트 레싱(1729~1781)과는 친분이 깊 었다.
“1755년 레싱은 모제스 멘델스존과 만나 친교를 맺는다. 몸집이 작고 볼품없으며 등 굽은 유대인 멘델스존은 그즈음 가장 뛰어난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앞다투어 그의 책을 읽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러 그가 사는 베를린의 비단공장으로 몰려갔다.”
독일에서 가장 먼저 근대정신에 앞장서서 작품을 쓰기 시작한 레싱은 멘델스존을 모델로 한 『현자 나탄』이라는 희곡을 썼다. 『현자 나탄』의 주제는 종교적 관용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이슬람의 지배자인 살라딘이 물었다.
“참된 종교는 어떤 것인가?” 유대교 상인인 나탄이 우화로 대답했다.
“똑같이 사랑하는 세 아들에게 마법의 반지를 물려줘야 하는 사람이 반지 두 개를 복제했다. 진짜 반지를 가지려 다투는 아들들에 게 현명한 재판관이 훈계한다. 신의 길에 합당하게 살아야 반지가 마법을 발휘할 텐데 무슨 상관인가? 각기 자신의 종교에 맞게 참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희곡은 큰 돌풍을 일으켰다. 주인공이 게토에 갇힌 완고하고 고루한 유대인이 아니라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유대인의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다. 레싱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를 비판하여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현자 나탄』의 주인공이 멘델스존을 모델로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미 유명했던 그는 더욱 이름을 떨쳤다. 멘델스존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유대인을 대변하게 됐다. 그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떠밀려서 최선두에 선 펭귄처럼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불리는 원조 모세 또한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신은 그를 이집트 탈출의 주역으로 선택했다. 유대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는 신의 명령에 모세는 겁을 먹고 거부한다. 말도 잘하지 못하고 지도자로서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핑계를 댄다.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붙여주지만 두려움이라는 핵심 감정이 마음 저변에 깔려 있다 보니 여러 장면에서 멈칫멈칫하는 태도를 보였다. 멘델스존 역시 계몽주의자였지만 개인적으로 조용히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유대교에 대해 비방하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변호하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 기독교 사회로부터 분노를 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또한 유대교의 개혁을 요구할 때는 스피노자같이 추방당하지 않을까 근심했다. 팽팽한 외줄 위를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유대인이 고유 신앙 을 지키면서 어떻게 유럽 문명의 일원이 될 것인가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모세오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유대인 계몽운동을 실은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게토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유대인의 도구가 독일어라 생각한 멘델스존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모세오경’을 독일어로 번역했 다. 유대인이 독일어를 배우면 독일 문학이나 과학 서적을 읽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유럽의 과학, 수학, 문학, 철학은 게토의 젊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젊은이들은 게토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는 두 가지 방향으로 유대교 전통과 계몽사상을 접목했다. 유대교 당국에는 강압적인 권위의 폐지와 보편성을 요구했고, 유대인에게는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되 유대교 전통을 따르고 율법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멘델스존은 유대인에게 전통 계율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비유대인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 사회의 관습과 법’을 따를 것을 권고한다. 그것은 유대교라는 낡은 전통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현실세계에 적응하고 참여함으로써 동화된 사회로부 터 인정받고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멘델스존의 이러한 노력으로 유대인 사회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젊은 유대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 게토를 나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멘델스존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유대화하여 다시 편성했다. 위대한 선조시대에 제정된 법률이라 해도 그것이 더 이상 필요 하지 않는 시대에는 신이 내린 법률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종교적 율법을 어기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므로 유대 당국에서 벌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랍비들의 견 고한 전통에 도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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