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국내외 가전제품에서 폭발·발화 사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피해 구제 체계는 여전히 공백 상태다. 드럼세탁기·TV·압력밥솥 같은 생활 필수 가전은 물론 해외 직구·병행수입 제품에서 사고가 나도 제조사는 ‘원인 불명’이나 ‘대상 제외’를 이유로 책임을 회피한다. 소비자는 감가상각과 유통 규정 사이에서 실질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 부담이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16일 세종시에서 샤오미 선풍기가 폭발해 불꽃과 파편이 튀면서 거실 매트가 불에 그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피해자는 사고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샤오미코리아에 제출했지만 회사 측은 “해외 직구·병행수입 제품은 상담 대상이 아니다”며 책임을 거절했다. 네이버 판매 스토어 역시 상품 교체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샤오미코리아 관계자는 “본사와 연계한 별도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별 사건을 넘어 통계 역시 이 같은 구조적 허점을 보여준다. 한국소비자원 통계도 피해 구제 공백을 드러낸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1년 3월까지 대형가전 피해 구제 접수는 4382건에 달했지만, 이 가운데 발열·폭발·화재로 분류된 사례는 39건(0.9%)에 불과했다. 소형가전 역시 전체 1007건 중 약 40건(4.0%)만이 폭발·화재 관련이었다.
접수 건수 대부분은 기능 불량이나 파손 등 비교적 가벼운 하자에 집중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폭발·화재처럼 소비자 안전과 직결되는 사고는 실제 발생 건수보다 신고·보상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낮다”며 “사고 초기 단계에서 실질적 피해 구제가 이뤄지지 않는 구조적 한계가 크다”고 우려했다.
보상이 미흡한 배경에는 구조적 문제가 겹쳐 있다. 사고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실제 소비자분쟁조정 사례를 보면 제품 결함 여부와 함께 사용자의 부주의, 설치 환경, 외부 요인이 뒤섞여 제조사가 책임을 단정하기 어렵다는 논리로 대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임이 인정돼도 보상액은 감가상각과 보험 규정에 따라 제한된다. 감가상각은 제품 사용 가능 햇수에 따라 가치가 줄어드는 방식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TV·세탁기 등 주요 가전의 환급·교환 시 사용 기간별 감가상각률을 적용하도록 규정. 5년 사용 가능 햇수를 기준으로 1년 사용 시 80%, 2년 사용 시 60%만 보상. 실제 복구비와 보상액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
소비자가 보상 청구 절차를 잘 알지 못하거나 ‘제기해도 소용없다’는 인식 탓에 문제 제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생활지표조사’에 따르면 불만을 겪은 소비자 중 약 40%는 사업자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를 겪고도 절차가 복잡하고 실효성이 낮아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제도 공백을 키운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제도적 한계도 분명하다. 국내에는 제조물책임법(PL법)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배상을 받기 위해선 소송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결함 증명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어 소송이 길어지고 비용 부담이 커 실효성이 낮다. 안전 인증 제도 역시 출시 전 단계에 집중, 판매 이후 결함 추적이나 사후 관리 장치는 미흡하다. 때문에 폭발·발화 사고가 발생해도 원인 규명이 ‘불명’으로 결론 나거나 조사 결과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해외 직구·병행수입 제품도 현행 제도의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공식 유통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조사와 판매 플랫폼이 모두 책임을 피하면서 소비자는 사실상 무방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국내 유통 제품에 적용되는 리콜·보상 절차가 병행수입품에는 작동하지 않아 동일한 사고에도 피해 구제 수준이 달라지는 불합리가 발생한다.
해외와 비교해도 제도 차이는 뚜렷하다. 유럽연합(EU)은 일반제품안전규정과 제조물책임지침을 통해 결함 제품의 리콜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으며, 일부 회원국은 판례와 소비자보호법을 통해 임시 거주비나 대체 제품 제공까지 제조사의 책임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미국은 소비자안전위원회(CPSC)가 리콜 절차를 직접 관리해 소비자가 수리·교환·환불 등 기본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제조사의 자율적 리콜과 피해자 개별 소송에 의존하는 구조여서 소비자 부담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제도 개선이 뒤따르지 않으면 같은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제조사와 판매사에 대해 폭발·화재 사고 발생 시 정밀 원인 조사와 결과 공개를 의무화하고, 보상 기준을 유형별로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조물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정부 차원에서 리콜과 피해 구제 절차를 감독·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며 “유통 경로에 따라 안전 기준과 보상 범위가 달라지는 현 구조는 소비자 신뢰를 흔드는 만큼 병행수입 제품까지 포괄할 수 있는 추적·관리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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