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광의 고대 이집트 미술과 신화 #5] 이름 없는 장인들의 마을① 데이르 엘 메디나를 바라보다에 이어
[문화매거진=한민광 작가] 노동자의 마을(Deir El Medina)의 장인들 가운데 드물게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손길들 사이 ‘이네르카(Inherkha)’와 ‘센누템(Sennutem)’이라는 두 장인은 특별히 우리에게 목소리를 전한다. 그들의 무덤은 크지도 않고 왕의 무덤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 안에 담긴 벽화와 색채는 장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가족을 향한 애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파라오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손길이 이제는 자기 이야기를 벽에 새겨 오늘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네르카(TT. 359)’의 무덤은 작고 소박하다. 그러나 벽에 남겨진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면 거기에는 권력의 과시가 아닌 한 사람의 삶이 진실하게 담겨 있다. 아내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자녀들과 함께하는 장면, 그리고 신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파라오 무덤의 벽화가 장엄한 신들의 행렬과 웅장한 제의(祭儀)로 채워져 있다면, ‘이네르카’의 무덤은 그에 비해 작고 단순하지만 따뜻하고 인간적인 온기를 준다. 그는 자신이 속한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믿음을 벽에 담아냈다. 신 앞에서 향을 피우는 장면은 정성스럽고, 손에 쥔 작은 제물은 그 마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림 속 인물들의 눈길은 곱고 단정하며, 그 표정 속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자부심과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또 한편에는 고양이가 칼을 들고 거대한 뱀을 공격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단순한 동물 그림이 아니라, 혼돈의 세력 ‘아포피스(Apophis)’을 무찌르는 태양신 ‘라’의 승리를 상징한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집안의 수호자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태양의 빛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그려졌다. 때로는 ‘아문-라(Amun-Ra)’의 힘을 대신하는 상징으로도 등장했는데, 이 장면 역시 바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 약해 보이는 작은 존재가 혼돈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모습은, 무덤의 주인에게도 죽음 이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고 태양과 함께 부활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작은 무덤이지만 그 속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크다. 그는 파라오가 아니지만 그의 삶도 신 앞에서 의미가 있었으며, 죽은 뒤에도 신성한 힘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란다는 고백처럼 보인다. 이런 벽화를 마주하면 오히려 파라오의 화려한 무덤보다 더 가깝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한 인간이 삶에서 품었던 소망과 사랑, 그리고 영원에 대한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센누템(Sennutem)’의 무덤은 조금 다르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화려한 벽화로 가득 차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천장 가득히 그려진 그림이 먼저 시선을 압도한다. 두 마리 푸른 개(아누비스의 상징)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위에는 태양 원반과 커다란 눈이 새겨져 있다. 죽은 자를 지키는 신성한 시선이 무덤 전체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그가 죽은 뒤에도 혼돈으로부터 보호받고 태양과 함께 부활하길 바랐음을 말해준다. 벽에 펼쳐진 다른 장면들 속에는 사후 세계의 염원이 뚜렷하다. 오시리스 신 앞에 서 있는 센누템의 모습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흰 바탕 위에 선명히 그려진 신들의 형상과 제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순간의 긴장과 경건함을 함께 느끼게 한다. 옆 벽면에는 미라를 감싸는 장례 장면이 보인다. 아누비스 신이 몸을 굽혀 죽은 자를 보호하는 모습이다. 누운 미라 위로 엎드린 듯한 신의 형상은 섬세한 붓질로 표현되어, 죽은 자가 혼자가 아니라 신의 손길에 맡겨져 있음을 확신시킨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농사와 풍요를 보여주는 벽화다. ‘센누템’은 저승에서도 밭을 갈며 풍요를 누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에 담긴 장면 속에서 그는 손에 낫을 쥐고 곡식을 거두고 있으며, 다른 인물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다. 단순한 농사 그림 같지만, 이는 죽은 뒤에도 이어질 삶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벽 아래쪽에는 무화과나무와 야자수, 석류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소와 새들이 함께 어우러진 장면이 이어진다. 풍성한 과일이 열려 있는 나무들은 사후 세계를 가꾸는 낙원과 같은 상징으로, 이 무덤 주인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뚜렷이 보여준다. 농부의 몸짓, 소의 발걸음,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레 그려져 있어, 장인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벽에 남아 있는 색은 지금도 선명하다. 붉고 푸른색, 황토빛과 검은색이 살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짐작게 한다. 옷의 주름선 하나, 연꽃의 무늬 하나까지도 치밀하게 표현되어 작은 선 하나에도 장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실제로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마치 센누템이 직접 속삭이는 듯하다. 그는 파라오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도 영원함이 있기를 바랐다. 그 소망은 벽에 남아 수천 년을 건너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이네르카’와 ‘센누템’의 무덤은 규모도 작고 장식도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장인들의 자존심과 영혼이 담겨 있다. 늘 남의 이름을 새기고 남의 영광을 그리던 손이 이번만큼은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파라오의 무덤을 장식하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벽에 남기지 못했던 수많은 장인 가운데, 몇몇만이 자기 무덤을 지을 수 있었고, 벽화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신앙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희귀한 순간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순간이다. 왕과 귀족만이 영원한 이름을 남기던 시대에 장인들도 자기 이야기를 새겼다는 사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이름 없는 다수의 삶이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간절한 몸짓처럼 다가온다. 무덤 벽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존재 선언이었다.
이 두 무덤은 그래서 특별하다. 규모로 따지면 크지 않고, 화려함으로 보면 왕의 무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오히려 더 깊다. 가족을 향한 애정과 믿음을 드러내는 작은 장면들, 사후 세계를 향한 소망이 담긴 색채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충분히 다가온다. 화려한 신화보다 따뜻한 가족의 그림, 권력의 과시보다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이네르카’와 ‘센누템’의 무덤은 이름 없는 대다수 장인을 대신해 서 있는 듯하다. 그 안에는 장인의 영혼과 자존심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을 건다. 우리의 손길이 있었기에 파라오의 영광도 가능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무덤의 벽에 새겨져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동료 장인들의 삶을 대신해 작은 무덤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래서 이 무덤을 나설 때면 묘한 감정이 따라온다. 화려한 장식과 크기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의 진실한 이야기라는 깨달음이다. 장인들의 무덤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은 진실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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