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정부와 국회가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9월 들어 여야 지도부가 조속한 국회 통과를 공언한 가운데 오는 10월 법안의 법제사법위원회 회부가 유력시되고 있다. 다만, 산업계에선 혹시라도 입법이 지연될 경우,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진 현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각국 정부는 이미 반도체를 안보와 직결된 전략자산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지원책을 집행 중이다. 미국은 2022년 제정된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근거로 520억달러(약 69조원)를 투입, 불과 1년 만에 보조금 집행에 들어갔다. 유럽연합(EU)도 430억유로(약 62조원) 규모의 반도체법을 추진하며 역내 투자 확대를 서두르고 있다.
일본은 라피더스에만 3조엔 이상을 지원, 중국은 국가반도체기금으로 2차례 3천억위안 이상을 투입했다. 대만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의 독주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제·인프라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법안 논의가 2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정체되며 제도적 기반 마련에 뒤처진 상황이다.
대외 변수도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와 의약품에는 자동차(25%)보다 높은 관세를 매길 수 있다”고 언급하며 수입산 반도체에 대한 무역장벽 강화를 시사했다. 해당 발언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 기업의 미국 수출 구조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삼성전자가 텍사스 테일러에 170억달러 규모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도 미국 실리콘밸리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워 고데역폭 메모리(HBM)와 차세대 D램 개발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하지만 관세 장벽이 현실화될 경우 이 같은 현지 투자와 국내 수출을 병행하는 전략은 직격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특별법은 세제 지원을 넘어 인력 양성과 인허가 절차 간소화까지 포괄, 산업 전반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투자·인재·규제’ 삼각 축을 동시에 해소하는 것이 핵심이며 설비투자와 R&D 세액공제는 이미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통해 일부 반영됐다.
하지만 산업계는 이를 한시적 조치가 아닌 상시 제도로 정착시키고, 세제 지원뿐 아니라 금융지원·전력·용수 등 인프라 확충까지 담은 종합적 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K칩스법’ 통과로 대기업 공제율은 8%에서 15%, 중견기업은 12%에서 20%, 중소기업은 16%에서 30%로 상향됐지만, 여전히 글로벌 경쟁국과 비교하면 미흡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국내 한 반도체 부품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국면에서 투자 타이밍을 놓치면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며 “대기업 공제율이 8%에서 15%로 높아졌지만, 미국·유럽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세제 지원을 상시화하고 다방면의 인프라를 강화해야 기업이 안심하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재 양성은 더 시급하다. 정부는 2030년까지 반도체 인재 15만명을 길러내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대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지역 형평성과 예산 확보가 여전히 걸림돌이다. 설비는 몇 년 안에 지을 수 있어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데는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에서 시차 문제가 크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2027~2028년을 AI 서버 수요 폭증기로 예측, 인력 공급이 시기에 맞춰지지 않으면 투자 확대에도 기술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규제 완화는 법안의 성패를 가를 최대 쟁점으로 평가된다. 반도체 공장은 인허가 절차와 환경영향평가만으로도 수년이 소요되고, 전력·용수 등 기반 시설 부족은 글로벌 경쟁에서 한국을 뒤처지게 만든 장애 요인으로 꼽힌다. 이번 법안에는 건축·환경 규제 간소화와 지자체 협의 절차 단축이 담겼지만, 근로 시간 유연화 문제는 여야와 노동계의 정면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여당은 근로 시간 유연화와 세액공제 상시화를 핵심 과제로 추진하지만, 야당은 ‘노동권 후퇴’와 ‘재정 건전성 악화’를 이유로 제동을 걸고 있다. 반도체 공정 특성상 주 52시간제 예외를 요구하는 산업계와 장시간 노동 회귀를 우려하는 노동계의 입장이 맞서면서, 정치권의 대립이 법안 통과 이후에도 후속 입법 과정의 난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과제는 남는다. 세액공제와 보조금의 지속성, 전력·용수 등 인프라 확충을 위한 재원 마련, 대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교육제도 개편은 모두 장기 과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발목이 잡혀 시간을 허비한다면 한국 반도체의 경쟁력은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약화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19년 발표 이후 환경영향평가와 상수원 확보 문제로 착공이 수년간 지연됐다. 전력 공급선 건설 과정에서도 산업부·환경부·지자체 간 협의가 길어지며 첫 삽을 뜨기까지 계획보다 3~4년 늦어졌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부처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실행 속도는 떨어지고 정책 효과도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 모든 산업이 어렵지만 그나마 잘 버티는 반도체도 중국의 추격과 미국의 견제로 불확실성이 크다”며 “특별법 통과를 계기로 보조금과 세제 지원, 인프라 확충이 종합적으로 뒷받침돼야 기업이 안심하고 장기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속한 제도 마련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유지할 방법“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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