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해외 생산거점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미국 시러큐스 공장 인수로 CDMO 시장에 진입, SK바이오팜은 임상 네트워크 확대로 글로벌 입지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최근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불법체류 근로자 단속이 발생하면서 인력·비자 리스크가 ‘보이지 않는 병목’으로 부각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오의약품은 합성의약품보다 공정 복잡성이 높아 숙련 인력 의존도가 높다. 세포 배양과 단백질 정제, 품질 관리 등 전 과정에서 경험 많은 기술자가 요구된다. 글로벌 업계에서도 인력 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에이피아이센터(APICenter) 연구에 따르면 미국 제네릭 의약품 생산시설 약 30%가 가동률 50% 미만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전문지 서플라이 체인 매니지먼트 리뷰(SCMR)는 미국 제조업 공장의 20%가 숙련 인력 부족으로 전체 설비를 다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단순한 설비 확충만으로는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으며 인력 확보 능력이 곧 글로벌 경쟁 우위로 직결되는 구조라는 해석이다.
이 같은 인력 리스크는 해외 거점을 넓히는 국내 기업에도 직결된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로부터 미국 뉴욕 시러큐스 공장을 약 1억6000만달러에 인수해 3만5000리터 규모 항체의약품 원액 생산 능력을 확보했다. SK바이오팜도 미국에서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 판매를 확대하고 적응증 확장을 위한 임상을 추진하며 글로벌 입지를 넓히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당장은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반응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시러큐스 공장 운영 인력이 전원 미국인으로 구성돼 있어 직접적 영향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SK바이오팜도 뉴저지 법인을 현지 인력 중심으로 운영해 단속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밖에 셀트리온, 유한양행, 씨젠 등도 미국 내 연구소·법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대규모 인력 파견과는 거리가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업계에선 당장의 충격은 제한적이더라도 향후 생산시설 확장이나 CDMO 진출이 본격화할 경우 인력·비자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맞물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거점 국가들이 노동·이민 규제를 강화하는 흐름은 글로벌 생산기지를 넓히는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숙련 인력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비자 심사 강화까지 겹치면 신규 인력 충원이 지연되고 생산 일정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난해 미국은 ‘국가 바이오·바이오매뉴팩처링 이니셔티브’를 통해 바이오 생산 인력을 전략 자원으로 규정하며 자국 내 인력 양성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 역시 EMA 중심으로 인력·시설 인증을 강화하는 등 자국 중심 보호 기조가 확산되고 있어 해외 기업의 진출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지에서 신규 인력을 충원할 때 비자 발급이 지연되거나 규제가 강화되면 생산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세포 배양·단백질 정제 등 공정 특성상 단기간 대체가 어려운 고숙련 인력이 부족해질 경우 손실 규모가 크게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정부 차원의 제약·바이오 분야 지원 기조는 강화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K바이오 혁신’ 행사에서 송도를 ‘바이오산업의 성지’로 지칭. 식약처 심사 인력과 예산을 확대, 허가·급여·약가 협상을 2027년까지 진행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바이오시밀러 임상 3상 요건 완화, 혁신 제품 사전 컨설팅 강화 등 규제 개선 과제를 추진하겠다는 방침도 제시했다.
하지만 국내 정책 지원과 달리 해외 생산기지에서는 인력·비자 문제가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남아 있다는 진단이 이어진다. 대규모 설비 투자와 규제 완화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현장의 안정적 가동 여부가 숙련 인력 확보와 비자 제약 대응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8일 산업부가 주재한 대미 투자기업 간담회에서 기업들은 “B1 비자 보유자의 현지 업무 수행은 단속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며 규정 명확화를 요구했다. 이번 사태를 단순한 이민 단속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경쟁 속에서 드러난 제도적 허점으로 보고, 제약·바이오뿐 아니라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대미 투자 전반에 걸친 리스크로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투자자 관점에서도 인력·비자 변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리스크다. 기업들이 공시하는 수천억 원대 설비 투자 계획은 단기적으로 시장 기대를 끌어올리지만, 밸류에이션을 좌우하는 핵심은 결국 생산라인의 안정적 가동 여부다. 글로벌 고객사와 장기 계약을 맺은 상황에서 납기 지연은 신뢰도 저하로 직결, 신규 수주 경쟁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해 성장 제약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공장을 짓는 속도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며 “현지 노동·이민 정책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생산 차질로 이어져 고객 신뢰를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바이오 생산 거점 다변화가 본격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인력 수급 계획과 규제 대응 전략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현지 교육·훈련, 정부 간 비자 협약, 로컬 네트워크 강화 없이는 대규모 투자의 성과가 반감될 수 있다”며 “결국 인력·비자 관리가 향후 K바이오 성장 궤도를 좌우할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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