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미 이민 당국에 의해 체포·구금됐다가 풀려난 우리 국민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미 이민당국은 적법한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도 체포했으며 우리 국민들에게 이에 대한 진술권도 보장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당시 이민 당국이 발부받은 수색 영장엔 남미계 불법 체류 혐의자 4명만 적시돼 있었으나 이들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300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를 끌고 갔다.
구금 후에도 근로자들을 72인실 임시 시설에 몰아 넣거나 생필품도 제때 지급하지 않는 등 인권 침해가 지속됐다는 증언도 나온 상태다.
이에 정부는 미국 이민당국의 한국인 대규모 구금 중에 일어난 인권침해를 전수조사해 외교채널을 통해 미측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적법 비자 소지자·영주권자까지 무차별 체포
체포영장에는 4명만 적시…체포 후 사후 영장 발부
미국 이민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석방된 한국인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체포 및 구금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합법적인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체포한 것이다.
당시 체포된 LG에너지솔루션 직원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직원들의 단기상용(B-1) 비자 소지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자신들에게 수갑을 채웠다고 밝혔다.
B-1 비자는 미 국무부 외교업무매뉴얼(FAM)에 해외에서 제작·구매한 장비를 미국 현장에서 설치·시운전하거나 현지 직원 대상으로 교육·훈련을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구금된 직원 중에는 미국 영주권자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한 직원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ICE에게 200명 체포 목표가 있었다"며 "남미 직원을 포함해 ESTA(전자여행허가) 비자를 가진 한국인 직원이 200명이 안 되니까 그냥 모든 직원을 끌고 가서 체포 인원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민당국이 발부받은 공장 부지 수색 영장에 남미계 불법 체류 혐의자 4명만 적시돼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즉, 300명에 이르는 한국인 근로자들은 체포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구금된 것이다. 이들을 체포할 때 '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흘 뒤 작성된 사후 체포 영장에는 직원들이 하지도 않은 자백이 표기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일간 구금된 근로자들에게 '인권 침해'가 가해진 것이다.
한 직원은 언론에 '구금일지'를 공개했다.
구금일지에 따르면 근로자들은 구금 초반에 72인실 임시시설에 몰아 넣어졌다고 한다. 1번부터 5번 방까지 있었고 구금자들은 방을 옮겨 다녔다.
늘어선 이층침대와 함께 공용으로 쓰는 변기 4개, 소변기 2개가 있었다.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변기 옆에는 겨우 하체를 덮는 천만 있었다고 한다. 일지에는 "생필품, 수건도 지급 못 받은 채 잠이 들었다. 지인이 수건을 하나 줘서 수건을 덮고 잠이 들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구금 3일차에 ICE 인터뷰가 진행됐는데 적법한 B-1 절차로 입국했는데 왜 잡혀 온 것이냐고 묻자 ICE 직원은 "나도 모르겠고 위에 사람들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외교부 "美 구금 인권침해 전수조사해 필요시 문제 제기"
이처럼 미국 이민당국의 한국인 대규모 구금 중에 일어난 인권침해 사례가 속속 보고되자 정부는 이를 전수조사로 파악하고 필요하면 미측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15일 기자들과 만나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한 관계 기업들과도 계속 회의를 하면서 사실 관계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해 보고 미측에 추가로 제기할 요구 사항이 있다면 제기해 나갈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 8일 이민당국에 구금된 한국인 317명 중 250여명을 영사 면담한 결과를 설명하면서 개인 건강이나 구금시설에 대한 문제제기, 인권침해 보고는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국자는 "현장에서 영사 접견을 한 내용은 아직 저희가 구체적으로 기록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 계속 정리 중"이라면서도 "1차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인종 차별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런 것이 적극적으로 우리 영사 접견 시에 제기된 기록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 이민세관단속국에)문제를 제기하면 아마도 미측에서는 당연히 자기들은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진행이 됐다라고 주장할 것"이라며 "그러다 보면 우리 국민들이 조기 출국에 애로가 생길 수 있으니, 저희는 조기 출국을 하고 팩트 파인딩에 기초해서 필요한 문제 제기는 그 이후에 한다, 이런 입장으로 현재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대표단은 이런 문제점을 적극 제기하는 한편 앞으로 정당한 비자를 받고 활동하는 우리 국민들에 대한 인권 침해가 없도록 애틀랜타의 총영사관과 ICE (애틀랜타)지부 간의 협의 체제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ICE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도 들었다"고 전했다.
외교부는 조지아주 포크스턴 구금 시설 내에서 인권침해 등 피해 사례는 각 기업이 취합하는 대로 전달받아 검토할 계획이다. 추후 인권침해 등에 대한 법적인 대응이나 보상 문제 등은 각 기업이 근로자들과 상의해 결정할 사안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정부 차원에서는 외교 채널로 이 문제의 문제점과 부당성을 제기할 것"이라며 "개인 차원에서 정말 이건 참을 수 없는 인권 침해라고 하면 사법적인 구제를 하게 되고 아마 회사 차원에서 법률 회사를 통한 그런(법적) 조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기업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인권 침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확인된다면 정부가 비자 제도 개선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으로부터 더 확실한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거나, 비자에 따른 활동 권한의 '폭넓은 적용'을 받아내기 위한 일종의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이 이미 비자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는 만큼 인권 침해 문제가 한미 간 비자 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최소한 우리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미측에 항의하고, 비슷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요구할 때 언급할 수 있는 요소로 사용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재환 인하대학교 교수 역시 "전수조사를 꼼꼼히 해서 기업이 수집한 내용을 정부 차원에서도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이에 대한 항의와 보상 등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관세 세부 협상에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16일 워싱턴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으로 입국한 뒤 특파원들과 만나 한국인 구금 사태의 협상 영향 가능성에 대해서는 "(재발 방지를) 우리가 강하게 요청해야 한다"며 "미국 측도 약간 과했다고 여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 구매 취소" "미국인 영어강사도 체포해라"…'반미 감정' 고조
이번 구금 사태로 인해 정치권은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모습이다.
이언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조지아주에서 구금됐던 우리 근로자들이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인권침해라든가 인종차별 사례들이 굉장히 심각했다고 생각하고, 국무부 부장관의 유감 표시로는 부족하다"며 "궁극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식적인 유감 표시 혹은 사과가 반드시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최고위원은 "일본이나 대만보다 더 한국의 영향력과 역량이 훨씬 더 다양하고 크고 가성비가 높기 때문에 미국의 제조 부활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이 문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 차원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고 강조했다.
앞서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한국인 구금 사태에 대해 "의도된 도발"이라며 "아무리 (현 정부가) 친중·친북 정권이라지만 동맹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모욕이고 수치"라고 지적했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서"이건 트럼프의 깡패짓"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김 의원은 "우리나라에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영어 가르치는 (미국)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실태조사까지는 해야 한다. 그래야 미국이 긴장한다"며 "그 사람들 영어 가르치고 관광하고 가는 건 불법 아닌가? 간이 조사해도 2000명은 넘을 것"이라고도 했다.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미국을 비판하는 글들이 다수 올라왔다. 한 누리꾼은 "한미동맹 유지가 중요하지만 미국의 이런 처우는 견딜 수 없다"며 "우리는 속국이 아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한국 국민들이 이렇게 화가 났다는 것을 미국에도 보여줘야 한다"며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산 불매' 운동도 시작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미국산 테슬라 차량 계약을 취소했다는 인증 사진이나 코스트코,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 미국 브랜드를 겨냥한 불매 관련 게시글이 올라왔다.
WSJ "반미감정 고조…해외 대미투자 줄일 것"
폭스뉴스 "이번 단속 한미관계 뒤흔들어"
미 언론들도 이번 사태로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사설을 통해 "미국의 동맹국들은 수출품에 더 높은 관세 부과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협조하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런 유연성은 결국 자국 유권자들의 인내심과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WSJ는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것 같은 단속은 트럼프가 원한다고 말하는 해외 투자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친트럼프 매체인 폭스뉴스조차 이번 사태가 우방인 한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폭스뉴스는 8일 이번 단속 작전이 "한미 관계를 뒤흔들고 있다"며 "미국이 자국의 대형 산업 프로젝트에 어떻게 노동력을 조달하는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또 "한국은 미국의 최우방국이자 핵심적인 아시아 파트너"라고 했다. 근로자 300여 명을 쇠사슬로 묶어 끌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확산될 가능성 등을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폭스뉴스가 이례적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건 동맹국 근로자들을 쇠사슬까지 동원해 집단 구금한 이번 사태가 트럼프 행정부가 핵심 기조로 내세운 '해외 투자 유치를 통한 미국 제조업 부활'에 상당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외 유명 기업의 공장이나 연구개발(R&D) 시설을 적극 유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기업에도 적잖은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폭스뉴스는 이번 사태가 제조업 부활을 위해 꼭 필요한 양질의 인력 확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의 주요 제조업 생태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현지 인력만으론 공장 건설 및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구조적 문제를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이번 단속으로 인해 우수한 노동력 확보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AP통신도 불과 2주 전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번 사건으로 핵심 동맹국인 한국 사회가 경악했다"고 진단했다. 또 "이번 사태가 많은 한국인들에게 혼란과 충격,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며 일부 의원들은 아예 보복 차원에서 한국 내 불법 취업이 의심되는 미국인들에 대한 조사까지 촉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AP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북한 위협 억지 등 안보 문제 및 양국 간 경제 협력 의존도 등을 고려하면 한국이 본격적인 맞대응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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