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이 미 이민 당국에 의해 무자비하게 체포·구금된 '조지아 구금 사태'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측이 관세 협상 세부 협의 과정에서 3500억 달러(약 488조원)의 대미투자 방식을 놓고 '투자 백지수표'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현금으로 투자를 하고 미국이 투자 대상 선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우리 정부는 '구금 사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동일한 사태가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미 투자 기업에 대한 비자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투자금 집행에 따른 외환시장 충격 방지 차원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역제안 하는 등 국익 우선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관세 협상과 관련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구금 사태'로 가뜩이나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찬 상태에서 미국이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며 압박하자 이에 대한 해법을 놓고 대미투자를 재검토 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김정관 장관 '빈손 귀국'…'대미투자 방식' 이견 못 좁힌 듯
'외환시장 충격' 우려…'무제한 통화스와프' 역제안
한·미 관세 협상 후속 협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3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관련해 미국 측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귀국했다.
지난 10일 미국으로 출국한 김 장관은 12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만나 관세 협상 대가로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이행 방안에 관해 집중 논의했다.
양국은 관세 협상 타결 이후 협상 내용의 '문서화'를 놓고 실무 협의를 벌이고 있으나 대미 투자펀드의 구조, 투자 방법, 이익 배분 방식 등에 대해 견해차가 크다.
미국은 자국 내에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우고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넣는 방안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정부는 유럽연합(EU)이 미국과 합의한 대로 보증 및 대출 형식의 투자를 원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비(非)기축통화국으로서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금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원하는 '현금 3500억달러'는 지난해 말 기준 한국 외환보유액 4163억달러의 84.1%에 달한다.
이에 정부는 투자 집행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외환시장 불안을 사전에 차단할 장치로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미국 측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와 유사한 구조의 관세 협상을 체결한 일본은 달러·엔 통화스와프를 무제한으로 체결해 외화 유출로 인한 타격이 적은 상태다.
미국은 투자 수익 배분도 일본과 비슷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5500억달러 투자를 약속한 일본은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 투자 수익금을 50 대 50으로 나누다가 회수가 끝나면 미국이 90%를 갖는 방식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김 장관에 이어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미국으로 출국한다.
여 본부장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미국 통상 당국 관계자 등을 만나 관세 협상 후속 협의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외교차관, 비자 개선 논의…美국무 "구금 사태 유감, 비자 개선 약속"
트럼프 "해외기업 투자 위축 원치않아…미국인들 훈련시켜주길"
관세 세부 협상 뿐만 아니라 이번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근로자 체포·구금 사태로 부각된 비자 문제 개선도 얻어내야 할 과제다.
이와 관련해 박윤주 외교부 1차관은 14일 크리스토퍼 랜도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한미 외교차관회담에서 비자 제도 개선 협력을 협의했다.
이날 박 차관은 미측이 우리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재발방지 및 제도개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요청하면서도, 이번 구금 사태의 초동 대응 직후 이뤄진 랜도 부장관의 방한은 후속조치를 위한 논의뿐 아니라 한미관계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시의적절한 방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은 이번 구금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 뒤 "제도 개선 및 한미관계 강화를 위한 전기로 활용해 나가자"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만큼 귀국자들의 미국 재입국에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이며, 향후 유사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활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한국 근로자들에게 합당한 비자가 발급될 수 있도록 후속 조치 관련 실무 협의에 속도를 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이날 회담에 앞서 조현 외교부 장관 역시 랜도 부장관을 만나 "구금 사태가 한미 양국에게 좋은 결과로 귀결될 수 있도록 후속 조치에 만전을 기해달라"면서 한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가 실행될 수 있도록 신경써줄 것을 당부했다.
비자 문제는 대미투자 협상보다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도 14일 자신의 SNS에 "우리는 그들을 환영한다. 우리는 그들의 직원을 환영한다"며 "나는 다른 나라나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겁먹게 하거나 의욕을 꺾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기업들이 매우 복잡한 제품, 기계, 다양한 '것들'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가지고 미국에 들어올 때, 나는 그들이 자국의 전문 인력을 일정 기간 데려와서 그들이 미국에서 점차 철수해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미국인들에게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제품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훈련시켜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며 그렇게 머지 않은 미래에 그들의 전문 영역에서 그들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기꺼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 현지 언론들도 제조업 부흥을 위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사설에서 "지난 9일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에 대한 이민당국의 무분별한 급습 여파가 한국에서 계속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소개하며 이처럼 진단했다.
WSJ은 지난 11일 이재명 대통령이 100일 기자 회견에서 한 발언을 귀담아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회견에서 "기업들 입장에서는 현지 공장을 설립한다는 데 불이익을 받거나 어려워질 텐데 고민을 안 할 수가 없겠다"며 "그게 아마도 앞으로 대미 직접투자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기술자가 있어야 기계 장비 설치를 할 수 있다며 "미국에는 그런 인력이 없으면서도 우리 사람들이 머물며 일할 수 있도록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WSJ은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미국인들이 듣기 거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라며 "미국에는 이런 일을 할 인력이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한미협상 장기화 우려에 "국익 최대화 시점 봐야"
정부는 협상이 길어지더라도 국익 수호를 최우선에 둔다는 방침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관세 협상과 관련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한참 더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12일 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이 서두르려는 기류가 있지만 우리는 여러 사항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역시 전날(14일) 브리핑을 통해 "정해진 목표가 있어서 목표 지점까지 가는 그런 협상의 양식이 아니라 서로 새로운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최적의 상태에 균형을 맞춰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서 "서로의 다른 조건하에서 영점을 맞춰가는 관세 협상이기 때문에 국익 최선의 지점에 가서 뭔가 국민들께 알릴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워낙 변수가 많은 협상"이라고 설명했다.
강 대변인은 15일 브리핑에서도 "결론적으로 최종적인 합의 시점에 이르렀을 때, 외환보유에 대한 입장이라든가 기업 보호 측면이라든가, 다양한 우리 국민의 이익 측면에 영점을 맞춰서 (국익이) 최대화하는 시점을 보면 시간 역시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투자 백지수표' 압박…김준형 "급하게 합의하면 국익 우려"
한미가 관세 협상 후속 조치를 놓고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쫓기듯 협상을 타결짓기보다 전체 국익을 고려해 합리적 결과 도출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날 연합뉴스에 난항을 겪고 있는 한미 무역 협의와 관련해 "자동차 관세 인하를 받은 것이 급하다고 미국의 (자동차 관세 인하) 행정명령을 문서화해 받아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협상한다면 국익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허 교수는 "자동차도 중요한 수출 품목임에는 분명하지만, 국민 경제에 미치는 모든 영향을 고려해 협상해야 한다"면서 "당장 유럽연합(EU)이나 일본보다 관세 불이익을 받는다고 해서 미국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문서화하는 것은 협상의 이익 균형이 일방적으로 미국으로 치우치는 것"이라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대미 투자 방식과 관련해서도 미국의 일방적 요구와 압박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무조건 휘둘리기보다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제시하려는 전략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15일 YTN라디오에서 "이번 요구를 들어주면 향후 방위비 분담금이나 국방비 인상을 요구할 것"이라며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수도 없고 이걸 들어주게 되면 그다음 파도는 또 온다. 그런 점에서 버티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미국은 우리의 기술과 투자가 엄청 필요하다"면서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하고 한국이 세계를 평정하고 있는데 중국의 기술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 지렛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88조원으로 수출업자 지원하자" vs "맘 알지만 선택지 아냐"
이처럼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전문가들의 해결 방안도 나뉘는 모습이다.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선임경제학자 딘 베이커는 11일 연구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 정부가 관세를 낮추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에 3500억달러를 내는 대신 그 돈으로 한국의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투자 약속의 성격이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트럼프가 설명하는 방식과 약간이라도 비슷하다면 한국과 일본이 합의를 수용하는 게 너무나도 어리석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15%로 낮춘 상호관세가 다시 25%로 증가하면 한국의 대미 수출이 125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0.7%에 해당하는 데 한국이 왜 125억달러어치의 수출을 지키고자 미국에 3천500억달러를 주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베이커는 지적했다.
베이커는 대미 수출 감소로 피해를 보는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데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금액의 20분의 1만 써도 한국이 더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혜민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15일 CBS라디오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리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만약에 합의를 깨게 되면 미국이 25%로만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다"며 "상호관세와 품목 관세는 별개여서 계속 협의를 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논리적으로 부당함을 이야기를 해서 설득을 해 나가야지 기분 나쁘다고 깨버리면 이 후과가 상당히 있다"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서 조금이라도 고쳐서 균형된 이익이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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