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정전은 “전기를 너무 많이 써서 공급이 이를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부터 듭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로 ‘정전은 여름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한여름 폭염에 에어컨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에 전력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순환정전이 잇따라 많이 발생하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그동안 한국전력(015760), 전력거래소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력수요가 치솟는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단기 전력수급 대책을 세워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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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남아돌아 수급 리스크…추석 블랙아웃 우려
그런데 전기의 특성을 보면 전력 공급이 적어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전력시스템을 보면 수요와 공급이 실시간으로 일치하고 주파수가 일정해야 안정적 전력 공급이 가능합니다. 만약 생산된 전기를 제때 소화하지 못하면 과부하가 발생하고 전압, 주파수가 불안해집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과잉 생산된 전력 때문에 발전기가 잇따라 가동을 멈추고 정전 사태까지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기 공급보다 수요가 급격히 적은 ‘저혈압’도 고혈압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이죠.
실제로 최근 들어서는 봄·가을철 전력 수급 대책이 중요해졌습니다. 산업부는 2023년에 최초로 봄·가을 전력 수급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계통 안정화 대책 시행 계획’을 수립·시행했습니다. 공급 과잉에 따른 블랙아웃 우려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이호현 산업부 에너지정책실장(현 산업부 2차관)은 “연중 상시 비상체계로 돌입하고 있다”며 봄·가을철 전력 수급 리스크 대비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봄·가을철은 냉난방 수요가 크지 않아 많은 발전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봄·가을철 맑은 날씨에 태양광은 봄·가을 낮시간에 전력을 많이 생산합니다. 태양광 보급이 늘면서 현재 태양광 발전량은 원전 31기의 발전량인 31기가와트(GW)에 달합니다. 그렇다고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로 충분히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상황도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전력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수급 불균형이 봄·가을철 전력 리스크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최장기 10일 추석 연휴로 전력 수요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할 전망이어서, 수급 불균형 우려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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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석학 경고 “韓 전력망 고립·밀집 문제 커”
산업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문승일 한국에너지공대 석학교수는 지난 9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열린 2025 대한민국 전기안전 컨퍼런스(주최 산업부·주관 한국전기안전공사) 특별강연에서 “올해 10월 추석의 전력수급 상황이 불안하다”며 “우리도 전력 안전과 안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스페인 정전 사고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앞서 지난 4월에 전철·열차·항공기·전화·인터넷·금융 결제가 한순간에 멈춰버린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참조 이데일리 9월6일자 <“‘스페인 대정전’ 남일 아냐”…시험대 오른 기후에너지부>)
특히 문 교수는 “스페인·포르투갈 정은 국가 간 문제가 걸려 있어 사고 원인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재정전 원인을 재생에너지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계통 부담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스페인·포르투갈은 다른 나라와 전력망이 연결돼 있어 하루 안에 복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력망은 정전 시 복구를 제때 못하게 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57%(2024년 기준)가 풍력, 수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전력 복구 측면에서 취약한 이유는 우리나라 전력망의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입니다. 이는 전력망이 다른 나라와 연결돼 있지 않고 수도권에 밀집돼 있는 특수성입니다. 문 교수는 “우리나라의 전력망은 섬과 같이 고립돼 있어 비상 시에 외부 전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며 “계통(전력망) 밀집도가 높고 강건할수록 대규모 정전 발생 시 사고 파급은 광범위하고 전력망 회복은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정부는 현재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일단 새정부는 신재생 확대부터 드라이브를 걸 방침입니다. 앞서 지난 8일 환경부는 국회 기후위기 특별위원회에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관련해 2018년 대비 40% 중후반에서 최대 67%까지 줄이는 4가지 방안을 보고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지금 당장 풍력발전, 태양광이 1~2년이면 (건설)되는데 그걸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방식으로 가야지 무슨 원전을 (신규로) 짓나”고 말했습니다. 김성환 환경부 장관(더불어민주당 전 정책위의장)이 내달부터 수장을 맡을 기후에너지환경부는 NDC 목표치를 상향하고,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리는 방안부터 속도전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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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생 키워야하지만 전력망 대책부터 시급
하지만 신재생 속도전부터 추진하는 것에 우려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해상풍력·태양광 등 깨끗하고 안전한 청정에너지로 가야 하는 방향성은 맞지만 전기요금, 전력망, 정부조직 개편안 등 현실적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이 많습니다. 목표치 달성을 위해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국가 전체적인 후유증이 클 것이라는 우려에서입니다.
조철희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 회장(인하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은 “이상적으론 재생에너지 전면 전환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론 전기요금 인상 부담이 있다”며 “‘목표치를 제시할 테니 따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시장과 함께 긴밀하게 소통해 현실적인 목표치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문주현 한국원자력학회 부회장(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은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늘리느냐’라는 것”이라며 “원자력을 배제하고 재생에너지만으로 그 길을 가겠다는 구상은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 전반을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빠뜨리고 전력망 문제까지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원자력학회는 지난 12일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에서 “대통령실과의 공식적인 대화의 장을 열어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밝혔습니다.
산업부 에너지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김희집 에너아이디어(Ener Idea) 대표이사는 “지금은 에너지 공급이 부족한 게 아니라 값싼 에너지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석유·가스 및 원전 수출은 산업부, 신재생·전력·원전은 기후에너지환경부로 에너지 부문이 나뉜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공감대부터 형성하고 에너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에너지 정책은 이견이 많아 해결하기에 쉽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유럽 등 글로벌 추세를 보면 신재생 확대가 지금도 늦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돼야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마라톤을 뛰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뛰다가 오히려 탈이 납니다. 에너지 전환은 미래 세대까지 봐야 하고 산·학·연이 함께 뛰어야 하는 장기 레이스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대통령실과 정부가 에너지 관련 산·학·연 소통부터 충분하게 하길 기대해봅니다.
*에너지와 미래=에너지 이슈 이면을 분석하고 국민을 위한 미래 에너지 정책을 모색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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