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취업비자가 국내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에 발급한 비자가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글로벌 인재 확보는 물론 미국 현지 경영에도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부 차원의 취업 비자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이민국(U.S. Citizenship and Immigration Services·USCIS)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H-1B 비자 발급 상위 100대 기업 명단에 국내 기업은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H-1B 비자는 일정 규모 이상의 현지 법인이 해외 인력을 스폰서해야 발급되는 대표적인 전문직 단기 취업비자다. 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 입장에선 경영 및 연구·개발 인력 확보를 위해 필수적인 비자다.
USCIS 자료에 따르면 미국 이커머스 기업인 아마존이 올해에만 1만44건의 H-1B 비자를 발급받으며 1위를 차지했다. 이어 △타타 컨설턴시 서비스(5505건) △마이크로소프트(5189건) △메타(5123건) △애플(4202건)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은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국내 기업 가운데 H-1B 발급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전자(139건)였다. 이어 △한화큐셀(18건) △LG전자(17건) △현대차(6건) △기아(3건) △SK하이닉스(2건) 순이다. 전체적으로 발급 건수가 초라한 수준이란 평가다. 국내 H-1B 비자 발급 1위인 삼성전자조차 발급 명단 100위인 딜로이트 텍스(Deloitte Tax LLP·273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이 자국 기업을 우선적으로 H-1B 비자를 발급하는 기조가 있지만 모든 해외 기업들이 불리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상위 100대 기업 중 약 14곳은 외국계 기업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인포시스(인도·2000건) △위프로(인도·1500건) △캡제미니(프랑스·1800건) △버추사 코퍼레이션(스리랑카·467건) △PHC 코퍼레이션(일본·1700건) △스위스 퍼시픽 LLC(스위스·291건) 등의 기업들은 외국계임에도 상당수의 비자를 발급받았다.
미국 국무부(U.S. Department of State)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들이 받은 H-1B 비자는 총 2289건으로, 인도(28만3300건), 중국(4만6680건), 필리핀(5300건), 대만(3099건) 등과 비교해도 한참 뒤처졌다. 이는 전체 비자 발급 건수 대비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문제는 트럼프 정부 재집권으로 비자 발급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단 점이다. 한국무역협회·미국정책재단(NFAP)에 따르면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H-1B 비자 거절률은 평균 17.8%에 달했다. 특히 2018년에는 24%까지 치솟았다. 이는 △오바마 1기(8.8%) △오바마 2기(7.8%) △바이든 행정부(3.2%)와 비교해 최대 3배에서 6배가량 높은 수치다.
비자 발급 차질은 국내 기업들의 미국 현지 법인 기업 운영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최근 조지아주 현대차 메타플랜트(HMGMA)에서 불거진 불법 이민 근로자 고용 문제도 결국 전문직 비자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숙련된 인력을 한국 본사에서 파견하려고 해도 비자 장벽에 막히면서, 현장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단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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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들은 그간 ESTA(전자여행허가제)나 B-1 단기 상용 비자 등으로 급한 불을 꺼 왔다. 재계에서는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호주·싱가포르처럼 '비자 쿼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캐나다와 싱가포르는 매년 각각 1만500명, 5400명의 쿼터 비자를 확보해 안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발급받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현지 법인 운영에는 본사와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거나 기술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국내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비자 확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 상황이 장기화하면 국내 기업의 미국 시장 경쟁력이 크게 감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도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경쟁력은 결국 인재 확보에서 결정된다"며 "비자 문제로 글로벌 인재 영입이 막히면 한국 기업의 장기 성장에 치명적인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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