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마구잡이' 이민 단속이 확산하면서 미국 곳곳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이 불안에 떨며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다.
이는 한인들은 지난 수십년간 근면·성실한 생활로 미국 경제에 기여해왔고, 최근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막대한 규모의 미국 투자를 약속했는데도 돌아온 것은 대규모 이민 단속이기 때문이다.
미 외교가에서는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 단속이 한미 동맹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WSJ "미 한인사회, 대규모 체포·구금 사태에 충격과 배신감"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단속해 한국이 300여 명을 구금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7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조지아 한인사회가 이번 대규모 체포·구금 사태로 충격에 빠졌다고 조명했다.
조지아에는 한국계 시설 약 100개가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지난해 기준 1만7000명 이상을 고용했다.
윌슨 장관이 "한국은 단순한 우방이 아닌 조지아의 글로벌 경제 전략 핵심 축"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이번 이민 단속은 한인 사회에게 두려움과 분노를 안겼다고 WSJ는 지적했다.
현지 한인들은 WSJ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가 한국 기업이 미국에 막대한 투자를 한 뒤 발생했다는 것에 배신감을 드러냈다.
WSJ에 따르면 조지아주 사바나 지역 한인 단체 채팅방에는 주말 내내 불안과 분노가 뒤섞인 메시지가 쏟아졌다. 채팅방에는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사업을 일궜으며,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런데 지지받기는커녕 밀려나는 기분"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미국 시민권자이자 현지에서 활동 중인 김호성 목사는 WSJ에 "한국인들은 자신의 문화와 뿌리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근면한 노동자로 환영해 준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이번 단속은 이를 무너뜨리고 두려움과 분노를 남겼다"고 말했다.
조다혜 서배너 한인회장도 BBC에 "나에게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의 이미지에서도 매우 충격적"이라며 이번 체포 작전이 한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전했다.
이보다 앞선 지난 3일에도 이민 당국은 LA 한인타운 중심가에 있는 한 세차장을 급습해 불법체류자인 직원 5명을 체포해 갔다.
당시 한인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중무장한 단속 요원들 10여명이 급작스럽게 한인타운에 들이닥치면서 이 일대에 있던 한인들이 매우 놀란 것으로 전해졌다.
캐런 배스 LA 시장은 관련 성명을 내고 "한인타운에서 발생한 이민 단속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 세차장은 지역 사회에서 누구나 아는 중요한 장소로, 이런 사업장이 표적이 되면 커뮤니티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민 커뮤니티는 우리 도시의 든든한 기반이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면서 "이러한 단속은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고 트럼프 행정부에 항의했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 '한인 구금' 트럼프 정부에 "실망"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도 이번 이민 단속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크게 실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9일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해당 사안에 대한 국민 의견을 물어본 결과, '투자국에 대한 지나친 조치로 미국 트럼프 정부에 크게 실망했다'라는 응답이 59.2%로 '이민단속국의 불가피한 조치로 미국 트럼프 정부의 조치를 이해한다'라는 응답(30.7%) 대비 2배가량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지역에서 '트럼프 정부에 실망했다'는 응답이 과반인 가운데, 특히 광주/전라(76.9%)와 경기/인천(60.9%)에서는 60%를 상회했다.
연령대별로 40대 이상(40대 62.4%, 50대 73.9%, 60대 73.2%, 70세 이상 57.0%)에서는 '트럼프 정부에 실망했다'는 응답이 많았다.
반면, 20대에서는 '미국의 조치를 이해한다'는 응답(45.9%)이 많았다. 30대에서는 두 의견(실망 43.9% vs 이해 43.5%)이 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이념 성향에 따라서는 의견이 뚜렷하게 갈렸다.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는 '트럼프 정부에 실망했다'는 의견(각 73.7%, 65.4%)이 매우 높았으나, '미국의 조치를 이해한다'는 의견(각 16.6%, 23.5%)은 저조했다. 반면, 보수층은 53.9%가 '미국의 조치를 이해한다'고 평가했다.
이주노동자 단체, 美대사관 앞서 '구금사태' 트럼프 규탄
트럼프 행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와 이주구금대응네트워크, 이주노동자 평등연대 등 이주단체는 9일 미 대사관 맞은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들을 쇠사슬로 묶어 연행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인권침해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번 단속은 반(反)이민 정서에 편승한 정치적 극우화의 일환으로, 국제적 비판을 피할 수 없다"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이민 정서를 선동하는 미국 정치인들의 행태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다.
아울러 한국 정부에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출입국의 폭압적 단속과 구금 정책을 돌아보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자주통일평화연대와 전국민중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트럼프위협저지공동행동 등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 트럼프 행정부를 규탄했다.
엄미경 민주노총 사무총장 직무대행은 "한국 노동자들이 마치 중범죄자라도 되듯 쇠고랑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이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됐다"며 "민주노총은 이 치욕적인 행태에 대해, 한국의 내수와 제조업을 망가뜨리는 이재명 정부의 대미 투자를 즉각 중단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해리스 前대사 "조지아 같은 일 반복땐 한미관계에 큰 문제"
외교가에서는 이번 이민 단속이 한미관계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해리 해리스 전 주한미국대사는 8일 이번 체포·구금한 사태와 관련해 "가까운 미래에도 이 같은 중대한 문제가 반복된다면 (한미관계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이날 해리스 전 대사는 이번 단속이 이례적이라며 "수개월 동안 준비해 왔던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해리스 전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는 보도를 언급하며 양국 관계는 여전히 정상 궤도에 있지만 한국 기업에 대한 이민 단속이 자주 발생할 경우 한미 양국 관계가 악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 민주당 내에서도 "이러한 무분별한 조치는 글로벌 파트너들의 신뢰를 훼손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소속 태미 덕워스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재계 지도자들을 만나 관세와 이민법 집행이 투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세관단속국(ICE)를 이용해 회사에 공포를 조장하고, 미국은 사업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며 "그리고 이는 우리 가족, 경제, 그리고 동맹에 큰 타격을 준다"라고 했다.
美정부, 이민단속에 혈안…트럼프式 '비자해법' 나올까
이번 사태는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대대적인 불법체류 근로자를 단속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이민정책 기조와 '관세 전쟁'을 지렛대로 외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유도하는 전략이 제도적 모순을 드러냈다.
즉 국내 기업의 대미(對美) 투자 확대와 소속 인력의 충분한 파견이 병존하기 어렵게 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이민자 추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단속 인력을 대거 모집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WSJ에 따르면 미 국토안보부는 불법 이민자 체포·추방 작전을 실행할 (ICE) 요원들을 대거 채용하기 위해 파격적인 급여·상여 조건을 내걸고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WSJ은 특히 미 정부가 내건 금전적인 유인책이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ICE는 우선 채용 계약 시 최대 5만달러(약 7천만원)의 보너스와 최대 6만달러(약 8천300만원)의 학자금 대출 탕감 혜택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급여 수준은 뉴욕시와 시카고 경찰국의 신입 경찰관이 연간 각각 6만1천달러, 6만2천달러가량 받는 것에 비하면 경쟁력 있는 조건이라고 WSJ은 비교했다.
WSJ은 이민자 추방 현황을 분석하는 연구단체 '추방 데이터 프로젝트' 자료를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 들어 지난 6월 말까지 ICE가 14만4천명을 추방했으며, 이는 이전 바이든 행정부의 작년 같은 기간 추방 인원 13만6천854명보다 약간 더 많은 수치라고 전했다.
문제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대다수가 미국 각지에서 생산 시설을 확충하고 있지만, 여기에 필요한 전문 인력의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합법적 취업 비자(H1B 비자)의 쿼터가 제한적이고,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비자 면제 프로그램의 일종인 ESTA(전자여행허가제)나 상용·관광 비자인 B1·B2 비자로 우회하는 '편법'이 만연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언제든지 대대적인 단속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비자문제에 대해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루스소셜에 다시 글을 올려 "그것(인재를 데려오는 일)을 신속하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그들(한국)이 말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검토해보겠다"면서 "우리는 함께 우리나라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발언으로 미뤄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그동안 큰 문제가 없거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미국 취업비자 정책과 불법체류자 단속의 제도적 상충을 인지하게 됐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훌륭한 기술적 재능을 지닌 매우 똑똑한 인재를 합법적으로 데려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길 권장한다"면서 "(그들이) 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美국토안보부 크리스티 놈 장관 "韓 근로자 추방될 것…일부는 범죄 책임져야"
한편, 우리 정부가 한국인 근로자들을 자진출국 형태로 귀국시키기 위해 미 당국과 협의 중인 가운데 미국 이민정책을 총괄하는 국토안보부의 크리스티 놈 장관이 자진출국이 아닌 추방될 것이라고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만일 한국인 근로자들이 추방될 경우 자진출국과 달리 미국 재입국 제한 등 불이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놈 장관은 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 정보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 국토안보 장관 회의에 참석차 영국 런던을 방문했다가 취재진을 만나 "조지아에서의 단속을 통해 구금된 개인들 다수에 대해 법대로 하고 있다"며 "그들은 추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부는 최종 퇴거명령 시한을 넘겨서 미국에 머문 것 이상의 범죄 활동을 했다"며 "그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미국 이민 당국과 한국인 근로자 석방에 대해 큰 틀에서 합의했고 추방이 아닌 자진출국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놈 장관이 자진출국이 아닌 추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진출국'을 '추방'으로 통칭해서 말한 것인지 실제로 자진출국 대신 추방하기로 했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는 "이번 사태는 모든 기업이 미국에 올 때 게임의 규칙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도록 하는 훌륭한 기회"라며 "이번 일이 미국에 대한 투자를 억제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미국에 와서 우리 경제에 기여하고 사람들을 고용하고자 하는 모든 기업에 미국 시민을 고용하고 미국 법을 따르며 올바른 방식으로 일하려 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장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기사에 언급된 여론조사는 지난 8일 전국 만 18세 이상 대상으로 무선(100%) 무작위 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RDD) 자동응답조사 방식으로 실시했다. 전체 응답률은 5.7%,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3%포인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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