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써도 어려운 단어를 박지연 대통령실 전담 수어통역사는 즉석에서 통역해야 했다. 박 통역사는 이 단어를 ‘AI, 한국 고유의 것’이라고 표현했다. 단 몇 초 만에 복잡한 의미를 쉽게 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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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통역은 박 통역사가 27년차 베테랑이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달 11일부터 대통령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박 통역사는 1998년 수어를 처음으로 배웠고 2008년부터는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국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최근 이재명 정부 대통령실이 역대 최초로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면서 전담 수어통역사로 채용됐다.
박 통역사에게도 이번 임명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박 통역사는 “수어통역사로 일하던 오래전부터 언젠가는 대통령실 수어통역사가 되고 싶었다”며 “마지막 소원을 이뤄 지금 은퇴해도 좋을 것 같다”고 농담했다.
기쁨도 잠시 박 통역사는 업무 강도가 높은 대통령실에서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박 통역사는 “국회에는 의원들이 각자 담당하는 분야가 있다”면서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흐름을 탈 수 있지만 대통령실은 모든 사안에 대처해야 해서 수어통역사에게는 난이도가 높다”고 했다. 박 통역사는 AI와 반도체, 조선 등 산업 전문 용어를 전달하는 건 물론이고 여야 회동이 있을 경우 각 당의 현안까지 파악해야 했다.
최근 현대차 공장에서 이민단속이 이뤄지면서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 중대 범죄 예방 대처 협정(PCSC) 등 미국의 제도와 현안까지 공부하게 됐다. 준비 없이 브리핑에 투입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브리핑 5분 전에는 자료가 나오는데 브리핑 공지가 너무 급박하게 전달돼 이를 전혀 보지 못할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박 통역사의 하루는 15분 남짓한 브리핑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평일 내내 잠잘 시간을 제외하고는 뉴스를 챙겨본다. 아침 7시 10분이면 시사 라디오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후에는 보도채널은 물론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뉴스까지 빠짐없이 모니터링한다. 대통령실 근무 이후 장만한 수첩도 ‘어닝 서프라이즈’, ‘온플법’,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 등 까다로운 단어들로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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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통역사가 공을 들이고 있지만 수어통역의 보급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대통령실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브리핑에서 수어통역이 제공되는지 모르는 농인도 많다. 한국정책방송원(KTV) 뉴스에서만 수어통역 화면을 내보내고 다른 방송사에서는 박 통역사가 지워진 영상을 쓰기 때문이다.
수어통역사 처우도 여전히 열악하다. ‘수어통역의 꽃’으로 불리는 국회 수어통역사조차 비정규직으로 매년 1년 단위로 재계약을 반복해야 한다. 국회는 이들을 직고용하지 않아 전문성이 떨어지는 용역업체가 고용을 승계하지 않을 경우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보수 수준도 턱없이 낮다. 영어 동시통역이 시간당 40만~50만원을 받는 반면 수어 동시통역은 10만원에 불과하다. 인력이 적어 교대 없이 장시간 통역을 이어가야 하니 체력 부담도 크다. 이런 조건에서 수준 높은 통역을 기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박 통역사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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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현실이지만 박 통역사는 수어통역이 일상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인들은 한국어를 외국어처럼 느껴 자막을 봐도 어색해하거나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한국인이 영어의 수동태와 능동태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듯 농인들도 수어통역 없는 콘텐츠를 즐기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는 “농인들은 누군가의 음성통역을 통해서만 발언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며 “앞으로 계속 수어통역을 하면서 농인들 삶의 질을 높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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