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올해 상반기 동안 미국 기업들은 치솟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최대한 자체적으로 흡수해왔다. 하지만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이 같은 ‘기업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다.
특히 7월 생산자물가지수(PPI)가 최근 3년간 가장 큰 폭으로 오르면서, 기업들이 더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관세와 수입물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영주 하나증권 연구원은 “상반기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들은 관세 등 비용의 약 22%만 소비자에게 전가했지만, 하반기엔 이 비율이 67%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고 전했다. 실제로 PPI 상승률이 CPI(소비자물가지수)보다 훨씬 빠르게 오르고 있어, 가격 인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 내 중소기업 10곳 중 3곳(28%)이 가격 인상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미자영업연맹(NFIB)의 조사 결과는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이는 과거 평균보다 5배 이상 높은 수치다.
■ 패션·식음료·유통…업종 불문, 관세 쇼크 확산
비용 압박은 특정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비재, 유통, 산업재, 자동차 등 대부분 업종에서 타격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패션 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랄프로렌은 전체 제품의 25%를 중국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리바이스도 중국산 원단 의존도가 높아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의류·신발협회(AAFA)는 “업계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식음료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쿠어스 맥주는 알루미늄 캔에 붙은 관세 때문에 하반기 포장 비용만 35억 달러(약 4.7조원)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설탕, 향신료 같은 수입 원재료의 관세도 부담이다.
유통업계는 낮은 마진 구조 탓에 이미 실적에 빨간불이 켜졌다. 월마트는 올해 2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4.8%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8.2% 줄었다. 재고를 교체할 때마다 원가가 오르고 있어, 가격을 소비자에게 넘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 산업재·자동차 업계는 ‘이중 고통’
산업재 기업들은 철강·알루미늄에 붙은 25~50%의 고율 관세로 신음 중이다. 중장비 업체 Caterpillar는 “이미 관세 충격이 예측치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에너지 기업 Diamondback Energy는 시추용 강관 가격이 연말까지 25%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원자재뿐 아니라 중국산 부품에까지 관세가 붙으면서, 포드와 지엠은 매출은 유지했지만 이익은 줄었다. 도요타는 미국 시장용 신차 가격을 약 20% 인하했지만, 수익성 방어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 “IT는 괜찮다?”…완전히 자유로운 업종은 없다
비교적 원자재 의존도가 낮은 IT와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관세 부담에서 한 발 비켜선 모습이다. 일부 정유·화학업체는 국제 유가 하락 덕에 원가 부담을 상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영주 연구원은 “관세 부과 품목이 계속 확대되고 있어, 이런 업종도 간접적인 영향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 중소기업은 ‘직격탄’…생존이 위협받는 수준
문제는 기업 규모에 따라 피해 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대기업은 글로벌 공급망, 환율 헤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미국 수입업체의 86%는 직원 50인 미만의 소기업이며, 이들은 대부분 특정 국가(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자금 조달도 어렵다. 대기업의 70%는 신용등급 기반으로 무역금융에 접근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30%에도 못 미친다.
중소기업 경기지수(MMBI)는 2분기 143.2에서 124.5로 급락했으며, 설문 기업의 26%가 순이익 감소, 24%는 매출 감소를 보고했다. 하나증권 분석에 따르면, 소기업이 올 상반기 관세로 낸 돈은 기업당 평균 170% 증가, 연간 환산 시 약 85만 달러(약 11억 원)에 이른다.
반면 초소형 내수 서비스업체들은 유연한 인력 운영 덕분에 고용을 늘리는 모습도 일부 나타났다.
■ 소비자 물가 전가 현실화되면…통화정책에도 부담
기업들의 비용 인상이 소비자에게 본격적으로 전가되면, 미국의 물가 상승세는 다시 가팔라질 수 있다. 이는 연준(Fed)의 금리 정책에도 큰 변수가 된다.
최근 잭슨홀 미팅에서 연준은 다소 완화적인(비둘기파) 태도를 보였지만, 7월 PPI 급등은 금리 인하 기대에 제동을 걸었다.
이 연구원은 “향후 CPI 흐름과 기업의 가격 인상 속도가 금리 정책의 방향을 가를 것”이라며, “단기 기대보다 중기적인 인플레이션 흐름을 면밀히 살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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