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에 자식 버리고, 빵 한 덩어리에 살인하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 조명한 신간 '붉은 굶주림'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굶주림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우선 끼니를 먹지 못하면 체내 포도당이 소비된다. 그 결과, 극심한 배고픔이 찾아온다. 그다음에 지친 몸은 지방을 소비한다. 지방마저 사라지면 단백질을 분해해 조직과 근육까지 먹어 치운다. 후과는 끔찍하다. 피부는 얇아지고, 눈은 돌출되며 다리와 배만 부풀어 오른다. 감염과 각종 질환에 취약해지고, 심할 경우 죽는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소비에트 시절, 소련에 속한 우크라이나 주민 중 상당수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 대기근이 찾아오면서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였다. 1929년부터 강제한 집단농장의 생산성이 급락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소련 당국이 농민들의 식량을 수탈하면서 상황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빚어졌다.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주민은 서로 의심했으며,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흔하게 빚어졌다. 최근 출간된 '붉은 굶주림'(글항아리)은 그 참혹한 역사, '홀로도모르'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조명한 역사서다.
언론인 출신으로 미국 역사학자인 앤 애플바움은 에둘러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터뷰와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참상에 대한 묘사를 사실적으로, 그것도 상세히, 주저하지 않고 써 내려간다. 그의 팬 끝은 독하면서도 예리하다.
기근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훔칠 수 있다면 뭐든 훔쳤다. 정직한 사람들도 도둑으로 변해갔다. 몇 주가 지나자 기아는 말 그대로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비이성적인 분노와 더욱 비상식적인 공격행위가 잇달았다. 한 생존자는 "기아는 끔찍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맹렬하게 화를 내고 난폭하게 변해 밖에 나서기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어떤 소년은 빵 한 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기도 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또 다른 소년은 "아빠가 어떻게 됐든 알 게 뭐야. 난 먹을 생각뿐이야"라고 말했다.
부모들도 자식들을 버렸다. 자녀들의 유치원에서 받은 빵을 부모가 대신 먹고, 자식이 굶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한 부부는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깊은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떠났다. 모든 아이가 목은 황새처럼 가늘었고, 팔다리 피부 아래로 뼈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아이들의 얼굴이 70년은 족히 산 것처럼 늙고 지쳐 보였어요. 그리고 그 애들의 눈은, 아, 하느님!"(대기근 생존자 중 한 명)
이제 사방은 무관심으로 가득했다.
"누구도 타인을 동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식욕조차 잃어버렸다. 목적 없이 마당과 거리를 배회했다. 조금만 지나면 걷고 싶지도 않아진다. 걸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누워서 죽음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국민이 죽어 나갔지만, 스탈린은 지원책은 고사하고 수탈에 매진하라고 명령했다. 식량을 거둬드리는 곡물 징발위원회 소속 '징발단'은 공동묘지와 헛간, 빈집, 과수원까지도 샅샅이 뒤졌다. 곡물은 물론이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찾아냈다. 개가 짖거나 물지 못하도록 개까지 사냥했다. 징발 단원은 무자비했다.
"엄마는 아기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니 (식량을) 제발 남겨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그 잔인한 자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져갔다."(대기근 생존자)
아무리 강철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해도 인간은 동정심에 약하기 마련이다. 편집증에 시달렸던 스탈린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읽었다. 그는 징발 단원이 마을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도록 단원을 자주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기근과 이어지는 수탈 속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무수히 죽어 나갔다. 우크라이나 국민 3천100만명 가운데 390만명(13%)이 사망했다. 사상자 대부분은 시골에서 나왔다. 390만명 중 350만명이 농민이었고, 40만명이 도시인이었다.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의 기대수명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대기근 이전 도시 남성의 기대 수명은 40~46세, 도시 여성의 기대 수명은 47~52세였다. 농촌 남성의 기대수명은 42~44세, 농촌 여성은 45~48세였다.
반면, 대기근이 시작된 1932년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도시와 시골 모두 약 30세, 같은 해 태어난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40세였다. 1933년에 태어난 남성의 기대수명은 5세, 여성은 8세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해에 많이 죽었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죽어갈 때, 소련 당국은 무심했다. 오히려 그들은 농산물 수출에 열을 올렸다.
우크라이나에서만 1932년 3천500톤(t) 이상의 버터와 586톤의 베이컨이 수출됐다. 1933년에는 버터 수출량이 5천435톤, 베이컨 수출은 1천37톤으로 늘었다. 두 해 동안 소련 수출업자들은 계란, 가금류, 사과, 견과류, 꿀, 잼, 생선 통조림, 야채 통조림, 육류통조림을 계속해서 선적했다.
스탈린의 야심은 수출 증가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타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투쟁의 근원인 민족주의가 농촌과 농민에게서 싹튼다고 봤다. 식량 지원이 가능했고,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카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인은 언제나 독립을 갈망한다'는 볼테르의 말을 늘 두려워하며 이 같은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다. 요컨대 스탈린의 의도는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우크라이나는 죽지 않았다. 결국 스탈린은 실패했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 지식인과 정치인 세대 전체가 살해당했지만, 그들의 유산은 살아남았다. 1960년대에는 민족적 열망이 되살아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며, 1990년대에는 다시 공개적으로 표출됐다. 200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의 우크라이나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다시 등장했다. 기근의 역사는 행복한 결말이란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비극이 아니다."
함규진 옮김. 8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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