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현금을 넣으면 비트코인이 나오는 미국내 '비트코인 ATM'이 새로운 사기범죄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미국의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기계들이 노인층을 노린 보이스피싱의 핵심 도구로 전락하면서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2023년 비트코인 ATM 관련 사기 피해액이 1억1000만달러(약 1470억원)로 2020년 대비 10배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미 연방수사국(FBI) 인터넷범죄신고센터는 같은 해 피해액을 2억4670만달러(약 3300억원)로 집계했다.
이처럼 피해가 급증하는 이유는 사기 수법이 단순하면서도 교묘하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은 정부기관이나 기술지원 직원을 사칭해 "계좌가 해킹됐다" "벌금을 내야 한다"며 피해자를 속인 뒤 가까운 비트코인 ATM에서 현금으로 비트코인을 구매해 자신들의 암호화폐 지갑으로 보내도록 유도한다.
이런 사기에 특히 취약한 계층은 60세 이상 노인들이다. 이들이 비트코인 ATM 사기를 당할 확률은 젊은 성인보다 3배 이상 높다. 비트코인 ATM이 기존 ATM과 유사한 외형을 갖고 있어 노인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정작 암호화폐 거래의 비가역적 특성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비트코인 ATM의 급속한 확산이다. 올해 초 기준 전 세계 비트코인 ATM 설치 대수는 3만8768대에 달한다. 2015년 500대에 불과했던 것이 10년 만에 77배 늘어난 셈이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미국이 3만1050대로 전체의 81%를 차지한다. 캐나다(3676대), 호주(1998대)가 뒤를 잇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서울 5대, 부산 2대 등 전국에 7대만 설치돼 있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다.
미국 내에서도 로스앤젤레스(1710대), 휴스턴(1339대), 시카고(1120대) 등 대도시에 집중 배치됐다. 이들 기계는 주로 편의점, 주유소, 슈퍼마켓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설치된다. 월마트, 서클K 같은 대형 소매체인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접근성을 높인 것이 이처럼 급속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급속한 확산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높은 수익성이다. 비트코인 ATM 운영업체들의 거래 수수료는 4~25%에 달해 운영 비용(총 수익의 3~6%)을 훨씬 웃돈다. ATM 운영업체인 코인플립은 4.99~21.90%, 바이트페더럴은 10~25%의 수수료를 부과한다. 이런 고수익 구조가 업체들의 공격적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업계는 비트코인 ATM 시장이 2025~2032년 연평균 54~63% 성장해 2024년 수억달러에서 2032년 수십억달러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미국에는 비트코인 ATM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이미 존재한다. 운영업체들은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에 '화폐서비스사업자(MSB)'로 등록해야 하고, 은행비밀보호법(BSA)을 준수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자금세탁방지(AML) 프로그램 개발 ▲고객신원확인(KYC) 절차 이행 ▲2000달러 초과 의심거래 보고 ▲일일 1만달러 초과 거래 시 화폐거래보고서 제출 등의 의무가 부과된다.
그럼에도 사기가 지속되는 이유는 이런 규제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업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은 의도적으로 KYC나 거래보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계들을 찾아다닌다. FinCEN은 ▲여러 거래로 나누어 보고 기준을 회피하는 '구조화' ▲지리적으로 떨어진 여러 ATM에서 동일 지갑으로 입금하는 '깔때기 배열' ▲암호화폐 거래 이력이 없는 고객의 갑작스러운 고액 거래 등을 위험 징후로 제시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피해 구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암호화폐 거래의 특성상 한번 송금된 자금을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 금융시스템과 달리 거래 취소나 환불 보호장치가 없어 피해자들의 구제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은 규제 강화에 나서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2월부터 암호자산시장법(MiCA)을 전면 적용해 비트코인 ATM 운영업체들에게 공식 인가를 의무화했다. 영국 금융행위규제청(FCA)은 등록되지 않은 암호화폐 ATM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철거를 명령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비트코인 ATM이 제공하는 편의성과 접근성 자체가 사기꾼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며 "기술적 해결책과 함께 강력한 규제 집행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광호 중앙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한국에서는 가상화폐 거래가 실명계좌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제도화돼 있고, 자금세탁방지 규제와 트래블룰 의무가 강하게 적용되고 있다"며 "현재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ATM만 일부 설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향후 신원확인, 거래 한도, 기록 보관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단계적으로 합법적 활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균형잡힌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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