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최주원 기자】 인공지능(AI) 산업의 법적 토대를 정비할 ‘AI 기본법’의 시행을 앞두고 각 계층에서 상반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산업계는 규제의 실효성과 실행 방안이 불분명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인권위는 핵심 조항의 시행 유예에 반대하며 기본권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법안의 구체성과 실행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향후 AI 산업 정책의 향방을 좌우할 전망이다.
3일 업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지난달 22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2026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의결했다. 이재명 정부의 첫 R&D 예산은 35조3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1.5% 증가했다. 이 중 AI 분야에 대한 투자는 대폭 확대될 예정이다.
정부는 투자 확대와 함께 AI 기본법을 개정해 기업의 규제 부담을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국회에는 AI 사업자에게 일정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제31조~제35조 조항의 시행 시기를 2026년에서 2029년으로 미루는 내용의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이 조항들은 투명성 의무, 고위험 AI 서비스의 사전 고지, 사용자 보호 등 핵심 규제를 담고 있다.
과기부는 지난달 말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AI 기본법의 시행령과 고시, 가이드라인 초안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초안은 산업계, 학계, 시민사회 등 각계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뒤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과기부 공진호 인공지능기반정책과장은 “규제는 필요 최소한으로 설정해 산업계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초안이 마련되는 대로 공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AI 기본법의 핵심 조항 시행 시기를 놓고는 이견이 적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같은 날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해당 조항의 유예에 대해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인권위는 이 조항들이 단순한 기술 규제가 아니라 국민의 인격권과 사생활 보호를 위한 기본적 장치라고 강조했다.
인권위가 제시한 근거 중 하나는 딥페이크 성범죄의 급증이다. 지난해 10월 기준 딥페이크 성범죄 신고 건수는 전년 대비 518%나 증가해 964건에 달했다.
인권위 인권정책과 관계자는 “국민의 인격권, 평등권, 사생활 보호는 후순위로 미룰 수 없는 기본 가치”라며 “산업계 우려는 시행령 정교화와 중소기업 지원을 통해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AI 업계는 법안의 실행 방식이 불분명해 현장 적용이 어렵다고 지적한다. 시행까지 5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어 기업들은 투명성 관련 의무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특히 생성형·고영향 AI 서비스 제공 시 사전 고지 의무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 IT 업계 관계자는 “법안만 봐서는 개발사와 이용사 중 누가 책임 주체인지 알 수 없다”며 “EU AI법처럼 공급자와 배포자의 책임을 명확히 구분해 각각에 대한 고지 의무를 별도로 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공급자는 배포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배포자는 실제 사용자에게 고지하는 방식의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법적 설계 자체에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시정조치 과정에서 법적 분쟁이 다수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공무원들도 조사 문구 작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승민 교수는 “사실조사 규정에 시정조치가 함께 들어간 입법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다”며 “조사 대상 조항의 모호성, 책무 규정의 성격, 과태료 부과 기준 등이 현실과 충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이 교수는 “조사 방해나 거부에 대한 별도 제재 규정이 없고 행정조사기본법을 따른다는 점은 과도한 개입 우려를 덜 수 있다”며 “이런 점은 입법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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