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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교습서로 잘 알려진 천자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우리말로 풀어쓴 말이다. ‘하늘은 푸르다’고 생각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의 사람들은 하늘을 깊고 어두운 색인 ‘현’(玄)으로 받아들였다.
‘죽음’, ‘어둠’ 등 부정적인 의미로 여겨지는 검은색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가 2일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린다. 호림박물관의 2025년 두 번째 특별전 ‘검은빛의 서사-검은색으로 펼쳐낸 무한과 생성의 풍경’이다.
개막 전날 열린 언론 프리뷰에서 오혜윤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우리의 옛 전통 속에서 검은색은 생명의 근원이자 내면의 지혜, 끝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보다 깊고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색이었다”며 “검은색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전통의 사유와 미학을 탐구할 자리로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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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선 검은색이 사용된 의복, 목공예, 도자, 회화 등 전통 문화유산부터 현대 작가들의 검은색과 관련된 작품 등 120여 점을 선보이다. 호림박물관 소장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13개 기관과 개인의 소장품을 함께 전시한다.
제1전시실은 ‘천(天)-검은 하늘’로 하늘, 권위, 신비를 상징했던 검은색에 대해 살펴본다. 호림박물관 소장품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은 하얀색 학과 검은색 학이 함께 하늘을 나는 모습을 표현해 눈길을 끈다. 검은색 학이 그려진 도자기 파편은 종종 발견되지만, 이처럼 하얀색 학과 검은색 학이 함께 그려진 것은 드물다는 것이 호림박물관 측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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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소장품인 보물 ‘박유명 초상’은 2006년 보물 지정 이후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에 나선다. 인조반정 때 큰 역할을 한 박유명(1582~1640)의 공신상(功臣像)으로 검은색 예복에 호랑이 모양의 흉배(胸背, 관복에 앞뒤로 붙이는 장식)가 인상적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이하응 초상 흑단령포본’는 오는 29일까지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제2전시실은 ‘계(界)-검은 세상’으로 만물을 담은 수묵의 세계와 무한의 세계가 펼쳐지는 흑지 바탕의 회화를 살펴본다. 검은 비단 위에 금빛으로 자연의 풍경을 그림을 그린 이금산수화(泥金山水畵), 검은색 바탕에 금색 또는 백색의 선으로 불상을 묘사한 흑지선묘불화(黑紙線描佛畵) 등 평소 보기 어려웠던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이건희 콜렉션 ‘금강산도’, 조선 후기 화가 이징(1581~?)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이금산수도’ 등은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져 오묘하면서도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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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은 ‘색(色)-검은 빛’으로 검은색 도자기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백미는 고려와 조선의 흑자(黑瓷) 24점을 함께 모아둔 전시다. 불에 그을려서 자연스럽게 검은색이 된 그릇은 물론, 탄소를 인위적으로 흡착시켜 검은색이 된 그릇을 만날 수 있다. 호림박물관 관계자는 “우리에게는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이 잘 알려졌지만 ‘흑자’도 고려와 조선 때 저장용기 등으로 많이 제작됐다”며 “이제는 흑자를 주목할 때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볼거리는 전통 문화유산들 사이에 전시된 최만린, 김기린, 김호득 이배 등 현대미술 작가들의 검은색 소재 작품들이다. 전통 속 다양한 의미를 지닌 검은색이 현대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시기간 총 2회의 문화강좌도 열릴 예정이다. 전시는 오는 1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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