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아포리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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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포리아로 가는 길

독서신문 2025-09-01 09: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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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어스 & 필로프리셉100 튜터 송아인

3년 전 여름, 저는 미국 뉴멕시코 주도 산타페 산속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근거리에 작은 편의점 하나 없는 그런 외진 학교로요. 왼쪽을 보아도 산, 오른쪽을 보아도 산뿐인 이 동네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여러 번 걸어 다니다보니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학교 주변 지리에 눈을 떴을 때 무언가 불편함이 느껴졌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길을 잃은 건 내 마음이구나 하고요.

세인트 존스 대학교에서는 정답이 없는 공부를 합니다. 온점보다는 물음표가 친숙한 공간입니다. 저는 아직도 1학년 첫 수학 수업을 아주 생생히 기억합니다. 수업 한 시간 반 내내 저를 짓누르던 긴장감과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궁금증, 그리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디’와 같은 혼란에 수업이 끝난 직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교수님은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지요. 그렇게 저는 우는 얼굴로 교수님과 처음 일대일 대면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나눈 대화는 아쉽게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대화랄 것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치지 않는 눈물로 저의 혼란을 표현했고, 교수님은 저를 진정시키시며 앞으로 차차 나아질 거라고, 익숙해질 거라고 위로해 주셨지요.

저를 울린 그 1학년 1학기 첫 번째 수학 수업은 많은 조니(Johnnie)들이 가장 사랑하는 수업이기도 합니다. 바로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 첫 번째 수업이지요. 첫 수업에서 우리는 원론을 여는 스물 세가지의 정의(Definition)와 각각 다섯 개의 공리(Postulates), 공준(Common Notions)을 두고 토의합니다. 첫 번째 정의는 이렇습니다: "A point is that which has no part."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수업을 준비하며 혼자 읽을 때는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수업에서 상상도 못한 질문을 마구 던지며 열띤 토의를 이어가는 친구들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벙쪘다고나 할까요. '점'은 뭔지, '부분'은 뭔지부터 시작해서, 세 번째 정의에서는 ‘선의 양끝은 점이다’라고 하는데, 그럼 선의 끝도 부분이 없다는 건가? 그리고 네 번째 정의는 '직선은 점들이 쭉 곧게 놓여 있는 선이다’라고 하는데 그럼 직선도 부분이 없는 건가? 두 번째 정의에서 ‘선은 길이만 있고 폭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럼 부분이 없어도 길이가 있을 수 있는 거네? 생각하면 할수록, 다른 정의를 더 참고하면 할수록, 그리고 질문하면 할수록, 답에서 멀어져 가는 듯했습니다. 저는 답을 찾고 싶었고 온점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세인트 존스 수업은 물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났습니다. 많은 경우에 시작보다 더 큰 물음표로요.

시간이 흐르면 물음표가 사그라들 줄 알았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으면, 토의를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예상과는 다르게, 세인트 존스에서 공부한 지 3년이 된 지금은 1학년 때에 비할 수 없이 큰 물음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새로운 물음표들이 저를 설레게 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저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도 찾아옵니다. 이렇게 멀리 공부하러 와서 내가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게 괜찮은 걸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여기서 하는 공부가 내 인생에 쓸모 있는 공부일까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나중을 위해 기술을 배우거나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책만 읽고 앉아있어도 되는 걸까 하고요. 그러나 결국엔 항상 다시 책으로 돌아갑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저서 『자유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세계 또는 그를 직접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정해준 대로 자신의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원숭이 같이 흉내 내는 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보기 위해서 관찰력을 사용해야 하고, 미리 내다보기 위해서 추리력과 판단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서 활동력을 사용해야 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분별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내린 후에는 자신이 신중하게 결정한 것을 실현해 내기 위해서 확고한 의지력과 자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관찰력, 추리력, 판단력, 활동력, 분별력, 의지력, 자제력. 세인트 존스에서 읽고 대화하는 활동을 통해 갈고닦는 것들입니다.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활동은 이 모든 힘을 길러줍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이곳에서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제 일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그 길은 물음표로 가득합니다. 물음표 갈고리 모양처럼 구불구불하기도 합니다. 인생을 좀 알겠다 싶다가도 모르겠고, 아포리아(난제) 속에서 재미있다가도, 때론 지쳐 눈물 흘리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점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인생보다는 물음표 가득한 인생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그려나가면 보다 더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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