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구씨 작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아주 긴 막대를 세워두고 그 옆을 걸어가면서 막대가 전혀 흔들림 없을 때, 완벽하게 다른 좌표에 놓인 개별적인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주로 그대로 있는 사물인데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도 모든 물건들이 책상과 바닥에 그대로 있을 때 그곳에서 오는 편안함은 적막이나 외로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다. 분리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내가 아닌 것들을 철저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조금은 거만하게도 안정감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낀다.
손으로 들고 있는 순간, 손톱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 사물이 있다. 던지거나 놓치면 어딘가로 떨어지고 부딪혀 부서지는 사물, 부서진 그 상태는 오히려 본래의 상태와는 더 가까워진 것이겠지만 기능이 없어진 사물이 더 이상 내 삶이나 일상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분리보다는 더 강한 연결 이후에 금방 잊어버리거나 지워버리는 과정 같다. 그새 길어버린 손톱을 잘라내는 것처럼 어딘가 닮았다.
매일 마주치는 사물 중 많은 경우가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 자리 그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개중 먼지가 쌓인 사물들도 많다. 4칸의 트롤리 가장 아래 칸 잡동사니들과 서랍 위 가장 높은 곳에 올려진 저금통 위에는 먼지가 소복할 것이다. 가끔 물티슈로 먼지를 닦아내며 내가 비와 눈을 맞는 것과 사물이 쌓이는 먼지를 받아내고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먼지가 쌓여 있는 사물에서 정지와 시간이 동시에 인지된다. 그것은 매우 인간스러운 일이지만 또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물의 상태를 조금 더 가까이 알게 되는 기분을 느낀다.
먼지가 쌓인 사물은 긴 시간 동안의 정지를 상상하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가끔씩 마주치는, 스스로 고장 나고 부식된 사물들은 긴 시간 동안의 정지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지질학적 과정인 풍화와 침식처럼 비슷한 시간을 겪는 사물은 주로 외부의 영향을 받는 곳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해를 통한 색바램, 부식과 고장, 해짐을 바라보며 그것들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시각적인 그로테스크함으로부터 오는 미가 아니라 정지와 시간이다.
정지된 상태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를 생각하고 그것들의 비밀 속으로 빠져들면서 매력적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밀스러운 시간은 감춘 것이 아니지만 알 수 없다. 그 시간이 어쩌면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지는 것만큼 느리고 정적인 것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래서 더욱이 상상하기 어렵고 상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에 구매한 샤워볼이 욕실에서 점점 해지고 있다. 그 까끌까끌함에 처음에는 놀랐다가 어느 날 조금은 축 늘어진 듯한 샤워볼에 거품을 묻혀 몸에 마구 비빈다. 가장 가벼운 자극으로 샤워를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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