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환 대표는 ^1995 시화물산 대표 ^1997‘ 부영물산 대표 ^2000~2003 여행레져tv 대표이사 ^2005‘~ 현재 목민 association 공동대표
살다 보면 인간은 자신이 예기치 않은 인연과 징후들이 하나둘 쌓여서 오늘의 내 모습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여기에다 존재하고 있을 때는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다가 사라지면 바로 생명을 위협하는 공기처럼 가족, 친척, 친지, 친구, 선배, 후배, 이웃, 지인, 귀인 등의 물심양면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나란 사람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걸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저‘인생’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나 보다, 지금부터 그런‘나의 인생’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학창시절 꿈꿨던 내 모습과는 달리‘남북경협’이라는 예기치 않은 인연을 만나 사업가로 변신해서 만나고 겪었던 북한·북한 사람들, 그리고 남북통일에 관한 내 개인적 경험과 소견을 밝히려 한다.
청년시절 만났던 한국 사회의 모순
1990년 여름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손엔 녹음기가 들어있는 서류 가방을 들고 반대쪽 팔에는 음료수 박스를 들고 민족통일촉진회 이동화 선생의 비새는 삼양동 아파트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가 세 번째 방문이었다. 앞서 두 번 원고청탁을 넣었지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책발간까지 1년 동안 가장 힘들게 원고을 받았다.
청탁 원고는 <해방후의 좌우대립과 미군정>이란 단락 주제에 <해방정국의 상황과 여운형의 건국준비운동>에 관해 집필한 송남헌 선생의 글에 대한 논평 <조국의 운명과 겨레의 앞날>을 부탁하러 찾아가는 길이다.
다음날에는 또 다른 원고청탁을 위해 다른 곳을 방문했다. 단락 주제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6.25 전쟁>에 대한 논평 <국제연합과 선거을 통한 대한민국 수립>의 원고청탁을 위해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 있는 윤치영 총재를 찾아갔다. 하지만 청탁원고는 직접 전달도 못한채 수위실에 맡겨놓고 입구에서 뒤돌아 나왔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도대체 이념이 뭐길래? 남과 북이 전쟁을 치르고 그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생이별했는데.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분들이 겨우 이념이 다르다고 사회적 대우와 살림살이가 이리도 하늘과 땅 차이가 날까?
1990년은 6.25가 40년이 흘렀는데도 대학가는 연일 메캐한 최루가스 냄새로 눈·코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6.25 발발이 7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념의 선점우위 투쟁은 진행형 같다. 조선왕조 500년의 성리학은 중국에서 건너와 조선에서 완성됐듯이 서구의 좌우 이념이란 것도 종국엔 한국에서 결말을 지으려고 저리 맹렬한가? 이념은 밖에서 만들어지고 완결은 왜 굳이 한반도에서 하는가? 정작 이념을 만든 나라에서는 용도폐기 된지가 오래전인데 말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한국학회 세미나에서 ‘북서풍의 바람’을 만나다
1993년 한겨레신문사와 미국 미시간주립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한국학회 세미나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21세기를 향한 한반도의 변환: 평화, 통합, 그리고 진보’란 주제로 열렸다.
이 행사에는 남북한 관계자들을 비롯해 14개국 500여명의 학자들이 참석했다. 나는 당시 한국과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오가면서 세미나 관련된 온갖 허드렛일을 다 챙기고 학술대회 참가자들을 인솔하는 간사 역할을 했다.
또 학술행사가 끝난 후에 결성된‘오대오동우회’의 간사를 맡았는데 이 시기에 한국 사회지도층과의 교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때 미시간주립대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세미나를 주관한 임길진 선생께서 중국에서 참가한 조선족 사업가 몇 사람을 소개시켜 주셨다. 당시 이 행사에는 문재인 정부에서 외교안보특보를 역임하는 등 2000년대 이후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깊숙이 간여한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당시 켄터키대 정치학과 교수)도 참석했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나는 북한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직접 무역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공교롭게도 1992년 노태우 정부때 은사이신 故 한승조 교수님께서 북방외교에 관한 국제세미나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었는데 이때 동구권 유고에서 방문하는 외교사절 베킷을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갔던 일도 있었다. 또 최서면 선생의 한-몽고 수교의 경험담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의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일명 북서풍(Northwest)을 타라.
돌아보면 당시 정계,학게,문화계,경재계등의 거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경험이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다.
북한 식량 지원 사업
1994년 여름 나는 대륙연구소 장덕진회장 (당시 흑룡강성 삼강평원 개발중), 한라그룹 정인영 회장과 중국의 당산항 개발을 위해 중국의 조선족 사업가와 함께 현지 시찰하러 갈 때 동행도 했다. 그동안 잦은 이사와 물난리로 관련 자료가 유실된 게 안타까웠다. 이때 같이 갔던 중국 조선족 사업가가 북측 관계자와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처음 얘기와는 다르게 딱 한 번 평양으로 돌아간다는 북한 고위인사를 10분 정도 만나게 해 주는데 그쳤다.누구였는지 기억도 없다
이는 아마도 조선족 사업가가 워낙 한국의 거물들만 상대하다 보니 그당시 나의 실력이 북한 인사에게 소개하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 조선족 사업가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회장 등 한국의 재벌들에게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초청했고 중국 지도층에게 소개한 인물이었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대북교역 거래는 고작 북한에서 물수건을 수입하는 정도였으니 규모나 액수 면에서 소개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던 그해 12월 23일, 사무실에서 처제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형부한테 무슨 팩스가 왔어요!”
임시로 광화문에서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을 때였는데, 뭔가 싶어 부랴부랴 군납하던 잠실 사무실로 갔다. 평양에서 부장(장관)급 이상이 베이징에 나갈 테니 이윤구 선명회 회장도 나오라는 급전이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중국 남북조 시기 유신이 쓴 시에서 유래된 말로 '근본을 잊지 말고 은혜에 감사하라'는 뜻이다. 물을 마시면서 어디서부터 이 물이 흘러왔는지 생각하라는 말이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큰 열매를 다 먹지 않고 남긴다는 뜻.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하거나 후대에 복을 베풀라는 얘기다. 절제와 양보의 정신을 의미한다.
[남북경협 기업인의 도전과 좌절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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