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작품은 케이팝 스타들이 귀신을 퇴치하는 설정에 한국 전통문화를 녹여낸 독특한 세계관으로, ‘K-컬처’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더 이상 한류는 단순한 대중문화 유행이 아니다. 드라마와 아이돌을 넘어 게임, 애니메이션, 전통 문화, 관광, 뷰티, 패션까지 포괄하는 ‘복합 콘텐츠 산업’이 되었고, 그 영향력은 문화적 차원을 넘어 경제적 파급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응은 꽤 과감하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6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한 해 동안 K-컬처 확산과 한류 연계 산업 육성을 위해 총 5조원을 투입한다. K-컬처 확산에는 1조8000억원, 한류 연계 붐업에는 3조2000억원이 각각 배정됐다. 단일 문화 분야 예산으로는 이례적인 수준이다.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예산의 쓰임새를 들여다보면 정부가 콘텐츠 산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콘텐츠 제작을 위한 자금 지원 확대다. ‘K-콘텐츠 펀드’ 출자 규모가 2950억원에서 4650억원으로 늘어나고,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대형 프로젝트 전략펀드도 150억원에서 650억원으로 확대된다. OTT, 게임, 음악 등 한국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창작자 지원도 구체적이다. 특히 창작 초기 단계에 있는 청년 예술인 3000명에게 연간 900만원씩 ‘창작활동금’을 지원하는 제도는 주목할 만하다. 창작의 시작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생계를 유지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제도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예술인 복지금고를 통해 긴급 생계자금, 의료비 등 기본적인 안정망도 마련된다.
해외 진출 지원도 한층 강화된다. 문학, 뮤지컬 등 장르 불문하고 한국 콘텐츠가 해외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자금으로 250억원이 책정됐다. 동시에 한국문화 거점인 ‘글로벌 K-컬처 허브’를 구축하는 데에도 2627억원이 투입된다. 이는 단기적 수출을 넘어서, 장기적 브랜드 체험과 지속적인 소비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으로 보인다. 여기에 외국인 관광객 4만 명에게 교통, 관광지 입장권 등을 포함한 ‘K-관광 패스’를 제공하는 방안까지 추진되면서, 콘텐츠와 관광, 소비를 하나의 생태계로 엮는 시도가 구체화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문화산업에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경제는 기존의 제조업 기반 성장 모델에서 전환점을 맞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과 같은 주력 산업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성장 속도는 점차 둔화되고 있다. 반면, 콘텐츠 산업은 상대적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고용 창출 효과도 높다. 무엇보다 K-컬처는 단일 산업군을 넘어서, 외교, 관광, 소비재 산업과 연결되는 확장성을 가진다. 단순히 수출 실적을 올리는 것 이상의 파급 효과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과제도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행력이다. 아무리 많은 예산이 배정돼도,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정부가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예산을 집행한 적이 많았지만, 정작 현장에선 절차의 복잡성, 행정의 비효율성, 실질 수혜의 부재 등을 지적받아왔다. 이번에는 과감한 집행뿐만 아니라, 민간 창작자들과 실질적 소통이 병행돼야 한다.
또 하나, 콘텐츠 산업은 ‘양’만으로 승부할 수 없다.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소비자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단순히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를 위해선 창작자의 역량 강화, 교육 시스템, 실험적인 기획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유연성 등이 필요하다. 질적 고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많은 콘텐츠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콘텐츠 산업은 시간이 걸리는 산업이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기획부터 성공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리며, 실패의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지속가능한 콘텐츠 생태계’ 조성이라는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태계의 중심은 언제나 창작자이며, 민간이다.
K-컬처는 더 이상 문화적 자부심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산업이고,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축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분야다. 이제 한국은 ‘문화를 잘하는 나라’에서, ‘문화로 먹고사는 나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5조원의 예산이 놓여 있다. 과연 이 투자가 한국 콘텐츠 산업의 다음 10년을 이끄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관건은 실행력이다. 예산을 어떻게 집행하느냐, 민간과 어떻게 시너지를 낼 것인가가 향후 성과를 가를 것이다. 수많은 지원이 창작자의 ‘행정 부담’으로 전락하거나, 실질적인 콘텐츠 개발과 시장 개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예산은 헛되이 소모될 수 있다.
이제 콘텐츠는 감성이 아니라 전략의 문제다. 정부의 결단과 민간의 창의력이 제대로 맞물린다면, K-컬처는 단순한 한류를 넘어 ‘K-이코노미’의 핵심 자산으로 부상할 수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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