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민화는 반복의 형식을 통해 삶의 주기성과 시간의 순환을 시각적으로 체계화하는 문화적 실천이었다. 그것은 반복되지만 정지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삶의 국면에 따라 의미가 갱신되는 동적인 상징체계였다. 민화는 삶을 장식하지 않았고 오히려 삶의 시간을 기록하고 재현하고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 회화 형식이 오늘날까지 많은 현대 작가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시간과 삶의 조직 방식이 여전히 작동 가능한 문화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민화는 예술이자 실천이며, 시각 표현이자 시간 구조의 체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삶을 담아낸 형식이었다.
동아시아 회화는 감상자의 시선을 움직이게 한다. 이는 화면 구성의 방식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특히 산수화(山水畵)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단일한 위치에 고정하지 않고 여러 지점을 따라 이동하며 풍경을 마주하게 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 감상의 방식은 단지 ‘풍경을 보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을 따라 걷는 시선을 전제로 한 문화적 체험이다.
서구 회화가 르네상스 이래로 원근법을 통해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전체를 조망하려 했다면, 산수화는 이러한 통합적 시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산수화의 전통은 부감법(俯瞰法), 이동 시점(moving perspective), 다중 시점 구성을 통해 화면 내 공간을 입체적으로 전개한다. 이 구성은 감상자가 정해진 위치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대신, 시선이 산과 계곡을 ‘산책하듯’ 따라가며 이동하도록 유도한다. 그림은 단일한 순간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는 경험으로 구성된다.
대표적인 예로 곽희(郭熙)의 이론서 ‘임천고치(林泉高致)’는 “산을 보려면 오르고 돌아보고, 멀리서 보고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산수화의 감상이 하나의 시점에서 정지된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전환을 포함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산수화는 풍경을 단일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화면을 따라 이어지는 길, 계곡, 나무, 바위, 구름, 강물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움직이는 자연을 구성하며, 감상자는 그 내부를 거니는 존재로 상정된다.
이러한 이동 시점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그림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감상자가 그 안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시간을 경험하게 만든다. 여러 장면을 연속적으로 맞닥뜨리는 감상 방식은 곧 시간의 경과에 동반되는 내적 서사 구조를 가능케 한다. 즉, 감상자가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장면을 넘는 경험’, ‘공간을 따라가는 시선’, ‘시간을 축적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하지만 산수화에서 표현되는 시간은 선형적인 발전이나 변화의 시간이라기보다 되풀이되는 자연의 질서, 인간의 내면과 외부 환경의 순환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고, 구름은 사라졌다가 다시 드리운다. 물은 흐르되, 끊임없이 돌아온다. 이 자연의 반복적 리듬 속 인간은 관찰자이자 일부로 존재한다. 감상자는 자연을 ‘지나가는 존재’이자 그 순환 안에 포함된 하나의 유기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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