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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민 경제전문기자]원청 기업들이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상의 법적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안전관리를 강화하면 노동조합법(일명 ‘노란봉투법’)의 덫에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산업계에서 확산하고 있다.
최근 법원이 현대제철·한화오션 사건에서 원청이 하청사를 상대로 산업안전 관리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노조법상 사용자성을 인정한 판례를 내놨다. 산안법과 중처법을 지키려다 하청사 노조와의 단체교섭 의무, 부당노동행위 책임까지 떠안게 된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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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 “하청 안전관리 개입시 원청이 실질적 사용자”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월 25일 현대제철과 한화오션 사건에서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두 사건에서 원청이 산업안전과 관련된 설비, 작업 방식, 작업 일정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통제하고 있는 만큼 ‘사용자’라고 판단했다.
서울 행정법원 제3부(재판장 최수진)는 두 사건 판결문에서 “이 사건 사업장의 설비, 작업 내용, 작업 방식, 작업 일정 등 모든 근로자의 안전과 관련 요소를 원청이 지배·통제하고 있는 이상, 원청이 사내 하청업체에 대한 안전 관련 지침을 마련하거나 그 이행을 감독하는 것이 법령상 도급인의 의무 이행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원청의 실질적인 지배력이 부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원청이 하청업체의 안전 관련 업무에 개입하면 하청사 현장 작업자들의 근로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실질적 사용자’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현대제철과 한화오션은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법이 도급인에게 요구한 산업안전 조치 의무를 다한 것에 불과할 뿐 하청업체에 대해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노조측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안전조치 자체를 사용자성 판단의 핵심 근거로 적용한 첫 판례다.
문제는 원청사들이 하청사 안전관리 업무에 개입하는 행위가 법적 의무일 뿐 아니라 산업재해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산안법 63조는 원청에도 하청과 동등한 안전관리 의무를 부여한 조항인 만큼 하청사 산업안전 이행에 원청이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 법 위반이 된다”며 “개입하면 노조법상 사용자가 되고, 불개입하면 법 위반이 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선진국은 원청에 적합한 수급인 선정, 협력·조정, 시설·설비 관리 의무만 부여한다”며 산업안전과 관련 하청과 동일한 의무를 부여하는 곳은 우리나라 뿐”이라고 덧붙였다.
A건설업체 안전 책임자는 “하청사들에 안전관련 교육과 지침. 장비 등을 제공하고 해당 지침을 준수하고 장비를 사용하는 지 여부를 관리, 감독하는 것은 법률상 의무일 뿐 아니라 실제로 산재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하청사 안전관리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산재예방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산안법은 63조에서 ‘도급인은 수급인이 사용하는 근로자의 안전·보건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중처법 5조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는 종사자의 안전·보건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67조는 도급인이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해 근로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 중처법은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해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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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청 안전관리 관여하면 사용자, 불개입시 법위반” 진퇴양난
“산재 예방을 위해 안전관리를 강화하면 노란봉투법상 사용자가 되니 진퇴양난이다. 중처법과 노란봉투법으로 에워싸서 기업들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느낌이다.”(A기업 노무담당 임원)
그동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안전보건 목적의 지시는 파견법·노조법상 사용자성 인정과 무관하다”는 행정해석을 고수해왔다.
고용부 관계자는 “하청노조가 정당하게 노사교섭을 통해서 원청에 부여한 안전관리에 대한 법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요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권리를 법원이 확인한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관련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른 피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먼저 불거질 가능성이 높은 문제는 안전관리 비용이다. 하청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안전인력 확충, 보호구 지급, 안전수당 등을 요구하면 누가 비용을 부담할지가 불투명하다. 원청과 하청의 단가 갈등, 비용 전가 논란이 불가피하다.
안전이 교섭 의제로 인정되면 그 범위는 안전수당이나 보호구 지급을 넘어 현장 안전관리에 영향을 주는 작업 방식·작업량·근무시간까지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안전’을 명분으로 사실상 근로조건 전반을 둘러싼 간접 교섭이 이뤄지는 셈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관리 가능한 교섭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다.
유일호 대한상공회의소 고용노동팀장은 “아직 1심 판결인 만큼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법원이 계속 안전관리 개입만으로 사용자성을 인정할지는 미지수지만 노란봉투법 시행에 따른 혼선과 기업 리스크는 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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