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기준 한국 체류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을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은 어리둥절해진다. 골목마다 걸린 간판에는 한글과 러시아어가 나란히 적혀있다. 곳곳에서 한국어, 러시아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키르기스어 등이 조화롭게 섞인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진한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거리에는 러시아식 빵집과 고려인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마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광주의 이태원'이라 불리는 광주 고려인마을이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옛 소련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후손이다. 긴 세월 끝에 다시 한국에 정착했다.
서울 이태원이 미군 부대의 미국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면 광주 고려인마을은 100년 전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곳은 단순 이주지가 아닌 고단한 역사의 풍파를 지나온 고려인들의 집단 귀환지다.
고려인은 왜 수도권이 아닌 광주 고려인 마을에 뿌리를 내렸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산업단지와의 인접성, 저렴한 집값,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교회와 단체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연대감, 환대, 심리적 지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이천영 목사의 도움으로 소수의 고려인 가족이 처음 월곡동에 정착했다. 그 후 '여기 오면 살만하다'라는 입소문을 타고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렇게 광주 고려인마을은 어느새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적인 고려인 공동체로 성장했다.
고려인들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구 소련지역으로 이주했다. 특히 1937년 연해주와 만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이주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들은 타국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도 약 100년 동안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라는 꿈을 간직해왔다.
마침내 도착한 한국은 낯설고도 익숙한 땅이었다. 언어와 일자리에 대한 어려움, 불안정한 주거 문제 등 여러 벽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차근차근 새로운 터전을 일궈갔다. 이들에게 고려인마을은 단순한 정착지가 아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다시 모여 함께 현재진행형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삶의 공간이다.
고려인마을의 상권은 식당, 고려인 마트, 가족카페 등 다채롭다. 고려인가족카페를 운영하는 정 지나이다 대표(여·60)는 "처음 한국에 와 8년간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다"라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가게 규모도 커지고 자리잡을 수 있었다"라고 했다. 이어 "고려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한국 손님들 입맛에 맞게 늘 연구하고 있다"라고 미소 지었다.
마을에서 케밥집을 운영하는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아리나(여·60) 사장도 만났다. 그는 "언젠가 한국에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라며 "광주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잘 맞아 이곳에 정착했다"라고 말했다. 언어 장벽과 행정 절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5년째 가게를 운영하는 그의 가장 큰 꿈은 한국 국적 취득이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어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며 "가족들도 모두 한국에 와 있다. 안정된 삶을 이어가기 위해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법무부 외국인정보 공동이용시스템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광산구에 거주하는 고려인동포는 4717명으로 집계된다. 방문취업비자 영주권자 등을 제외한 재외동포(F-4)비자는 3799명 규모로 이들 중 월곡동(1·2동 포함)에 거주하는 수는 82.5%(3134명)이다. 통계 외 인원을 포함하면 약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마을에서는 단순한 생계유지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통해 공동체의 뿌리와 정체성을 되새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는 비고려인 러시아 커뮤니티와는 차별화되는 고려인 마을만의 특징이다. 카자흐스탄 출신 문빅토르 화백(남·74)은 강제이주열차, 한글 문양, 4대에 걸친 조상들의 삶을 작품에 담는다. 그는 "강제이주의 역사를 잊지 않고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예술로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 '고려인 선조', '세자매' 등 작품에선 이주와 실향의 아픈 역사가 작품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예술뿐 아니라 고려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존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월곡동에 위치한 고려인문화관 '결'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려인 유물'만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지난 2021년 세계인의 날에 맞춰 문을 열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김병학 관장(남·57)은 중앙아시아에서 25년간 체류하며 고려인 관련 역사·문화 자료를 꾸준히 수집해왔다.
그가 모은 항일운동 자료와 다양한 문화유산 등 유물은 1만2000여점에 달한다. 이 중 23점은 2020년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공식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높다. 김 관장은 "고려인의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광산구가 건물을 마련해 문화관을 열 수 있었다"라며 "이곳이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 '연리지' 공간이 되길 바란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근처에는 고려인들의 '코리안 드림'을 돕는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송출되는 고려방송(GBS, FM 93.5MHz)은 한국 정착을 꿈꾸는 고려인들이 광주로 모여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러시아어 70%, 한국어 30% 비율로 24시간 전 세계에 방송되는 고려 방송은 국내외 고려인 동포 사회의 든든한 소통 창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방송의 주요 콘텐츠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한국어 교육, 출입국·사회통합 등 법무부 위탁 교육, 한국 생활 적응을 위한 실질적 정보 제공 등이다.
이믿음 고려방송 PD는 "메인 시간대 1분당 접속자가 2만~14만명에 달한다"라며 "광주뿐 아니라 싱가포르, 미국, 호주, 브라질, 영국, 일본, 중국, 스웨덴 등 세계 각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200여 민족이 청취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 PD는 "고려인들은 가족이 함께 정착할 수 있는 지역을 고민하는데 방송을 통해 광주에서 살아가는 선배 고려인들의 생생한 경험담과 한국의 법·제도, 문화 차이 등을 알리며 안정적인 정착을 돕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광주가 이주민을 특히 잘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진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주민정책과 팀장은 "이주민 분포가 과거 외국인 근로자 위주에서 최근에는 가족 단위, 장기체류자, 귀화자, 유학생 등 지역사회에서 장기 거주하는 이주민 형태로 변화했다"라며 "이들의 경제 및 사회 활동 참여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이주문화를 바탕으로 지역사회 통합과 활성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주민 정책 추진의 동력도 확보됐다"라고 했다.
실제로 광주 고려인마을은 2013년에서 2017년까지 '고려인주민지원조례' 제정과 비영리법인 고려인마을 설립 허가 취득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2017년부터 2022년까지는 고려인 '동행위원회'를 발족해 의료와 법률 자문 분야에서 구체적 지원이 이뤄졌다. 지난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난민 고려인들이 유입되면서 마을은 더욱 확장됐다.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은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해 동행위원회, 어린이집, 역사 유물 전시관인 월곡고려인문화관, 미디어센터 등 다양한 기관과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과정엔 여전히 현실적인 어려움은 존재한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68)는 "이곳은 원주민과 이주민이 서로 도우며 지내고 있다"라며 "광주광역시 및 광산구청이 도와주셔서 고려인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크게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비자문제가 해결되면 좋을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F-4 비자를 가진 고려인은 LH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다"라며 "광주에도 빈 LH 아파트가 많지만 비자문제로 입주가 어렵다. 최근 고려인마을에 사람이 몰리다 보니 집값이 많이 올랐다. 새터민도 LH에 입주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박 팀장은 "고려인동포의 최종적 바람인 국적 취득 등은 국가와 중앙부처에서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기에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한계가 일부 있다"라고 했다.
타 이주민 커뮤니티와 다른 광주 고려인마을만의 특징은 어떤 게 있을까. 박 팀장은 고려인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한 지원기관과 새날학교 교육시설을 통한 생활 지원, 생일과 명절 등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축하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서적 지지, 고려 FM, 나눔방송 등을 통한 다양한 정보제공과 공유 등을 이곳만의 특징으로 꼽기도 했다.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선 "구 차원에서 관내 대학교 유학생과 중도입국자녀 멘토링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과 사회적응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라며 "가족센터의 방문 교육을 비롯해, 심리상담 및 민간 단체와 협력해 한국어교육, 진로 탐색과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는 중도입국 학생들이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교육기관도 존재한다. 교육청의 다문화 대안교육 위탁기관으로 지정된 '광주 새날학교'다. 김영경 새날학교 교감은 "학교 학생의 70%가 고려인, 나머지는 중국·태국·필리핀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감은 "새날학교는 학생들의 정체성과 자존감 향상을 위해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라며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는 취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과에 진학·취업 연계 지원도 이뤄진다"라고 부연했다.
이곳에서 우주베키스탄에서 온 아지자(여·18), 카자하스탄에서 온 티무르 (남·19)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두 학생은 모두 한국 생활에 '언어'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새날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제는 한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지자는 "한국어가 힘들었지만 새날학교 덕분에 익숙해졌다"라며 "앞으로 어른이 되면 조경 디자이너가 되고싶다"라고 말했다. 티무르는 "아직 학과는 안 정했지만 좋은 대학에 입학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가장 큰 장벽은 언어와 문화다. 광주이주민종합지원센터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연령과 상황에 맞춘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청소년에게는 학업과 학교생활 적응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을, 여성에게는 교사 경력을 살린 일자리 연계를 지원한다. 고령 이주민에게는 자조모임, 나들이 등 여가와 사회교류의 기회를 마련한다.
이외에도 의료 진료, 통번역, 상담, 부모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 중이다. 특히 갑상선 질환 등 건강에 취약한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은 센터를 통해 암을 조기 발견하고 수술까지 받은 사례도 있다. 또 학교 폭력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경찰이나 변호사와 연계해 법적 지원도 제공한다.
광주 고려인마을 이주민 종합지원센터장 전득안 목사(55)는 "처음엔 이주민 관련 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주변을 보니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들이 많아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기자가 찾은 이주민종합지원센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전 목사는 "아이들이 센터에서는 밝지만 정작 한국 학교에서는 언어 장벽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교사와의 관계도 깊어지지 않는다"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실제로 광주 고려인마을 인근 5개 초등학교 중 2곳은 고려인 학생 비율이 50%를 넘고 한 곳은 75%에 달했다. 하지만 언어 지원은 방과 후 선택 수업에 그쳐 실질적 효과가 미미한 실정이었다.
더 큰 문제는 학습 격차다. 일부 초등 고학년 학생은 여전히 유치원~초1 수준의 한국어만 구사하거나, 구구단조차 외우지 못한다. 사춘기에는 학업 부진에 자괴감까지 겹쳐 '나는 바보가 아닐까'란 말도 내뱉는다. 안타깝게도 학습을 도와야 할 부모 역시 대부분 3D 업종에 종사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한국 학교 경험이 없어 자녀의 학습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 목사는 "고려인 여성 중 교사 경력자들이 많다"라며 "계약직이라도 교사로 활동할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어 "아이들이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도 한국어 향상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관련 예산은 연 2000만 원 수준으로 단체별로 300~50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현장에서는 축제 같은 일회성 행사 대신 그 예산 일부를 실제 아동 교육과 문화·정서 지원에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주민들이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 차별'이다. 전 목사는 "차별은 무심한 말과 태도, 그리고 무관심에서 시작된다"라며 "외국인에게 먼저 인사하고 이름을 묻는 것, 그 작은 관심이 편견을 줄이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 마을처럼 이주민들이 함께 모인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이주민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서울 광희동의 '러시아·몽골 거리'는 러시아·중앙아시아 출신의 비고려인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마트 중심으로 느슨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그러나 광주 고려인마을과 인천 함박마을은 고려인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모인 정착지로 체계적인 지원과 정체성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대비 속에서 인천 함박마을은 또 다른 고려인 공동체로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인천 연수구 연수1동에 있는 함박마을은 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려인 밀집 지역이다. 원래는 조선족 동포들이 살던 동네였지만 이들이 부평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고려인이 메꾸기 시작했다. 주민 1만2000명 중 9000명이 고려인이며 근처 학교 두 곳도 고려인 학생의 비중이 80%나 됐다.
고려인이 많은 지역 중 인천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과거 광주에 자리를 잡은 고려인들의 친척들도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더 많고 공항도 가까운 인천에 자리 잡게 됐다. 특히 이곳을 찾은 고려인들은 광주에 정착한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었다. 비교적 학군이 좋으며 집 값이 쌌던 함박마을은 이들이 머물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원래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 조금씩 늘던 고려인 인구는 2017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코로나 시기에도 이어져 2022년 한국의 전체 외국인 수가 줄어드는 동안에도 고려인은 오히려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인구의 증가는 고려인 사회적 자본의 축적으로도 이어졌다. 경제뿐만 아니라 음식, 문화, 의사소통의 용이함까지. 함박마을은 고려인에게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고려인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는 마을 곳곳에서 나타났다. 1987년 연수구 토지개발공사 당시 만들어진 마을에 색다른 향취가 섞여 들며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빽빽이 있는 낮은 건물들은 지어진 지 30여 년이 지남에 따라 이제는 오래된 느낌이 든다. 건물 간판에는 한국어가 아닌 낯선 글자들이 적혀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음식점, 빵집들도 거리에 즐비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분위기다.
특유의 분위기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고 생소한 언어가 주위에서 들린다. 낮의 마을은 한적했지만 저녁 5시부터는 고려인들을 태운 차와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려인들은 대개 근처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데 이들을 위한 차로 새벽 5~6시와 저녁 5~6시의 마을은 늘 복작거린다.
마을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은 고려인 밀집 지역이 주는 편리함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함박마을에서 꽃집 '매직로즈'를 운영 중인 김이리나 씨(여·55)는 여성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주민들이 다 같이 모여 살다 보니 자기 나라 언어로 얘기할 수도 있다. 통역사나 이주민들을 위한 사무실도 다 여기 있다"라고 말했다.
이리나 씨는 17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이다. 13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다가 아들의 추천으로 우즈베키스탄식 꽃집을 열게 됐다. 가게는 소박했으나 곳곳에 장식된 풍선과 한국보다 훨씬 큰 꽃에서 개성이 엿보였다.
고려인들의 귀환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 건 2004년 3월 이후부터이고 특히 고려인의 한국행 노동 이주가 증가한 건 H2 비자(중국·구소련 지역 동포를 대상으로 한 방문취업 비자로 제조업, 건설업, 서비스업, 농축산업, 어업 등 특정 업종에서 3년간 취업이 허용된다)가 시행된 2007년부터다. 17년 전에 이주한 이리나 씨는 비교적 초기에 이주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인들의 특징을 논할 때 소련 해체 등의 역사적 배경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는 이리나 씨의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리나 씨는 자신과 꽃집을 추천한 아들, 이주민을 대상으로 부동산 일을 하는 딸,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의 국적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이리나 씨의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아들은 우크라이나, 딸은 키르기스스탄이며 사위는 카자흐스탄, 며느리는 러시아다. 그는 "옛날 소련 붕괴가 영향을 미쳤다. 아들의 경우 이혼한 전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우크라이나에 갔기에 국적이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소련 해체는 당시 고려인들에게 심각한 시련으로 다가왔다. 우수한 농업 기술로 생활하던 고려인들은 소련 해체와 함께 국가들이 분리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인이 한국으로 이주하는 원인이 됐다.
이렇게 한국으로 눈을 돌려 귀화한 고려인들은 대체로 한국 생활에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7년 전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크레프 가게의 사장 지이고르 씨(남·36)도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 특성상 "먹는 것이 특히 편하다"라고 말했다.
보블린에서 파는 음식은 그가 어렸을 때 먹던 음식들이다. 가장 잘 팔리는 음식은 코티지 치즈(우유로 직접 만든 치즈)를 이용한 음식이다. 지이고르 씨는 "옛날에 비해 메뉴가 많이 바뀌었다. 라즈베리랑 딸기 섞은 메뉴는 예전에는 없었다"라며 가게 메뉴를 소개했다.
지이고르 씨는 "러시아에서 살았을 때는 고려인에게 맞는 음식도 없었고 그들과 얼굴도 달랐다"라며 "한국에서 계속 가게를 운영하며 곧 세상에 나올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드러냈다. 지이고르 씨는 현재 같은 이주민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고려인 밀집 지역이란 특징은 단점으로도 작용했다. 지난 10년 새에 고려인이 갑자기 늘면서 원주민들과 갈등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함박마을 내에서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고려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일대 범죄 통계를 분석한 결과 해당 지역에서 일어난 전체 범죄 가운데 외국인이 저지른 범죄는 5% 미만에 그친다. 또한 최근에는 상호 간의 소통과 교류가 많이 증가해 갈등이 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어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고려인들이 모여 의사소통이 편한 환경은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다가치배움터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김귀숙 씨는 "이주 가정 아이들의 경우 한국 문화와 생활을 접하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 아직 한국어가 미숙하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지난 3월 31일 문을 연 다가치배움터는 내외국인 사회통합을 위한 맞춤형 교육 공간이다. 이곳에서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안종현 씨도 옥련동의 예시를 들며 한국어를 일상에서 자주 접할수록 빠르게 익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려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함박마을 쪽 초등학교와 달리 옥련동에 있는 학교들은 내국인이 훨씬 더 많다. 같은 고려인이라도 옥련동에 있는 아이들이 한국어에 더 많이 노출돼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역사적 배경도 고려인의 한국어 습득을 어렵게 했다. 박봉수 디아스포라 연구소 소장(여·63)은 "고려인들은 이주 전 머물던 국가의 문화적·사회적 환경 특성으로 한국어에 노출되지 않은 채 한국에 왔다"라며 "역사적으로 봤을 때 조선어 말살 정책이 있었던 건 물론 고려인들도 신분 상승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오랫동안 조선족을 비롯한 동포들을 위해 일해오다가 지금은 고려인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려인들이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현실을 피력했다. 특히 같은 고려인이라도 국적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비자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들은 F4 비자를 받지만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들은 H2 비자를 받는다. 최장 4년 10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F4 비자와 달리 H2 비자의 경우 한 번 한국에서 나가면 다시 들어올 때 6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비자 제도 문제는 고려인의 경제적 어려움과도 연결된다. 박 소장은 "고려인 남편과 우즈베키스탄 혹은 러시아인 부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동거 비자인 F1 비자를 갖고 있는데 이 비자는 일할 수 없는 비자다. 그렇다 보니 고려인은 대부분 외벌이 가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둘 다 외국 국적이다 보니 이 경우 이혼을 해도 한 부모 가정 등록이 불가능하다. 부인의 경우 F1 비자라 아르바이트도 불가능하며 현금만 받는 일을 해도 걸리면 벌금이 더 나가게 된다"라며 고려인이 처한 현실을 강조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고려인들의 가정생활에도 악영향을 준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정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이들의 교육과 학교생활을 챙길 수 없는 상황이다. 박 소장은 "이혼한 고려인 가정의 경우 자녀를 혼자 키우다 보니 근무 시간에 아이들이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천시는 양육비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한국어도 익히지 못한 채 학교에 들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년을 싸웠다"라고 비판했다.
이 외에도 고려인은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애 등록이 불가능해 시위해야만 했었고 장애인 등록 이후에도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소형차 주차 시 주차 요금 50% 지원 등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고난에도 한국을 떠나 다시 돌아가겠다는 고려인은 많지 않다. 박 소장도 "현재 한국에 온 고려인들은 돌아갈 마음이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이로 인한 문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특히 교육 문제는 글로벌 이주 국가로서의 도약을 위해서라도 해결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언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면 이는 취업 및 경제적 활동의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대별로 이어지는 경제적 어려움은 고려인과 한국인 사이의 단절을 만들어내고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박 소장은 "함박마을에는 600명의 초등학생이 살고 있는데 이 아이들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뒷받침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라며 "이 아이들이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하거나 기술을 배워서 나라로 돌아가서 활동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잘 교육받은 고려인이 본국으로 돌아가 활동하면서도 우리나라에 계속 관심을 가지는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에 들어온 고려인들도 다신 나간 고려인들도 교육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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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 서은정 기자 sej@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김민 기자 kbgi001@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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