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 정상들이 함께 모이는 '다자외교 무대'에 처음 나설 예정이다.
조선중앙통신은 28일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 초청에 따라" 9월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도 이날 김 위원장을 포함한 26개국 정상 및 정부 수반이 참석한다고 발표했다. 참석 명단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이란 정상 등이 포함됐고, 한국 측에서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 대통령실은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 계획과 관련해 "정부는 이 내용을 사진에 인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 대면하는 것은 2019년 이후 약 6년 만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6월 시 주석은 평양을 찾았다.
이번 행사는 여러 면에서 '첫 번째' 기록을 남긴다. 북·중·러 정상이 한 자리에 함께 모이는 것도 처음이고, 김정은 위원장이 다자 외교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역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과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다자 외교무대에 활발히 나섰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위원장은 줄곧 양자 정상외교에만 집중해왔다.
이런 점에서 이번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은 김정은이 김일성처럼 보다 적극적인 외교 행보에 나서려는 신호탄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그동안 다수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국제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 위원장이 참석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번 방중 결정이 단순한 다자 외교무대 데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북한 내 정치 일정, 국제 외교 지형 변화, 대외 이미지 전략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1. 내부 행사 앞두고 '중국 원조' 절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방중 결정을 이끈 주요 배경으로는 북한이 당면한 내부 정치 일정과 경제 위기가 지목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북한이 올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와 내년 노동당 9차 대회를 초라하지 않게 성대하게 치르려면 중국의 원조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북한 내 쌀값이 급등하고 민생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중국 지도부와의 정상회담은 자연스럽게 경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라는 설명이다.
정 부소장은 북한 시장에서 2024년 상반기까지 1kg당 5000원대를 유지하던 쌀 가격이 2025년 6월에 1kg당 1만원을 넘어섰으며 7월에는 1만3000원대로까지 올랐다면서, 만약 중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쌀 수입 등이 없으면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두 개의 중요한 행사를 치러야 할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북한이 올해 개장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에 대규모로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관광 분야에서도 북중 협력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역시 내부 체제 안정과 권위 강화라는 목적을 강조했다. 임 교수는 이번 방중이 "오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행사를 빅이벤트로 만들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며 이를 계기로 "시진핑의 북한 당창건 기념 축하 답방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80주년에 시 주석을 평양으로 초청함으로써 정권의 위상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설명이다.
2. '북중 관계 강화'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이 최근 강화되는 한미일 협력 흐름에 대한 전략적 맞대응으로 북중러 3각 공조를 본격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번 전승절 참석은 한미일 협력에 따른 대응"이라며, "푸틴 참석을 포함한 북중러 사회주의 연대 과시 속에서 북한이 삼각 관계의 '키맨'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단순한 초청국 참석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교 구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설명이다.
임을출 교수 역시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에 대한 맞대응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며 한미일의 대북 비핵화 공조를 무력화하려는 '빅카드'라고 분석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을 전략적 세력으로 삼아, 스스로를 '슈퍼파워급 지도자'로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해석으로도 이어진다.
남성욱 고려대학교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BBC에 "김정은은 푸틴과 시진핑 같은 슈퍼파워 지도자들과 자신이 '동급'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며 "트럼프에게 북한을 설득하거나 압박하려 하지 말고, 대등한 관계에서 군축 협상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전했다.
남 교수는 "앞으로 북미 협상이 열릴 수는 있지만, 비핵화 협상은 없고 군축 협상만이 있을 것"이라며,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 간 협상만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굳혔다고 해석했다.
반면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중러 공조' 해석에 선을 그으며, 이번 김 위원장의 방중을 삼각 연대 과시보다는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 복원"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가진 단독 외교 행보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에 자기가 휘말리는 걸 굉장히 부담스러워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왕따 국가 두 개 사이에 끼는 건 중국 입장에서 이미지 손상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전승절 참석은 '북중 관계 복원'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외교 행보라는 것이 김 교수의 해석이다.
"북한은 작년부터 이미 올해를 '체제 공고화의 해'로 보고, 그 핵심 중 하나로 북중 관계 복원을 준비해왔습니다. 이건 돌발 대응이 아니라 사전에 짜인 외교 전략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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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PEC·북미 정상회담 등 향후 '외교전 대비'
이번 방중은 단순히 북중러 연대를 과시하는 차원을 넘어 앞으로 다가올 국제외교 일정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고립을 벗어나려는 외교 재개 시도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성장 부소장은 "10월 말~11월 초 한국 경주에서 개최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진핑 총서기가 참석해 이재명 대통령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김정은이 북중 관계 복원에 나섰다"고 진단했다.
양무진 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 성공에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김 위원장이 이번 행보를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공개 외교 활동에 시동을 건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에 대한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전성흥 서강대 중국학과 교수는 다자외교 무대에 김정은 위원장이 나선 소식을 접하고 "북한이 곧 미국하고 협상을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딱 들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국제무대에서 '강국 이미지'를 과시하려는 욕구는 늘 있었지만, "하필 지금"이라는 시점에는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과 긴장 완화나 교류 협력을 강화하는 진보 정권이 한국에 들어섰고, 무엇보다 하노이 회담이 무산됐지만 북한 입장에서 여전히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인물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이어 "북미 관계 정상화는 트럼프 시기 외에는 쉽지 않다"며 트럼프가 대외적으로 여러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대북 협력이 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북한이 판단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도 "트럼프 대통령의 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이루어질 수 있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중러와의 입장 조율 차원의 성격도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과거에도 북미 회담을 앞두고 시진핑 주석과 먼저 만나 정책 공조를 모색한 전례를 들어, 이번에도 비슷한 외교적 사전조율이 있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편 김동엽 교수는 이번 방중이 북미 대화를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에 선을 그었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은 제로"라고 잘라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 이재명 대통령이 북미 대화의 매개자가 되겠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던졌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며 "북한은 이를 들을 생각조차 없다"고 전했다. 이어 "북한은 지금 러시아,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몸값'을 키우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외교전략은?
김정은 위원장의 전승절 열병식 참석을 계기로 북중러 협력이 강화된다면 한국의 안보 환경은 한층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북한과 중국이 핵무기를 급속도로 늘려감으로써 동북아에서 핵 비확산 체제가 이미 붕괴된 상황"이라며, "이재명 정부가 여전히 북한의 비핵화 목표에 집착한다면 한국의 안보 환경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북한과 러시아 간 무기, 기술, 군수 분야 협력이 강화될 가능성은 한국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지목된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전성흥 서강대 중국학과 교수는 "한국의 안보 위협으로 직결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할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위협이 도리어 한국에 새로운 협상 카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전승절 참석을 남북 대화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각의 기대에 대해 전 교수는 "이번 전승절을 북한과의 물밑 접촉의 기회로 삼는 건 오판"이라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라며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한국과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 역시 BBC에 "김정은의 의도는 한국이나 미국에 대항해 북중러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국 대표단과 만난다면 오히려 자신의 본질적 의도를 희석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다"며 한국 내 일부 기대는 "섣부른 해석"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한국은 안보 차원의 대응과 함께 장기적인 외교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전 교수는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사회주의 정권은 20년, 30년을 내다보고 외교 전략을 세우지만, 한국은 정권 교체 주기가 짧아 장기 전략이 부재하다"고 꼬집으며 "섣부른 성과를 기대하기보다 중국과 러시아 관계 관리에 힘쓰고, 동시에 한미 공조를 강화하는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한국 외교부는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과 관련해 "한중 간 소통을 지속해 왔다"라며 "관계기관의 정보를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고 28일 밝혔다.
외교부는 "중국의 전승절 행사가 다자외교의 무대라고 지칭해야 되는 상황인지 명확히 답변드리기 어렵다"면서도 "중북관계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길 기대한다"며 남북 간 대화와 협력에도 열려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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