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드는 길목, 오래된 향교 마당이나 궁궐 입구에서 눈길을 끄는 고목이 있다. 가지가 단정하게 퍼져 있고 키는 20m를 훌쩍 넘는다. 여름 한복판에는 소박한 흰빛 꽃이 피고 가을이면 콩처럼 생긴 열매가 달린다.
화려하지도, 눈부시지도 않지만 세월을 이겨낸 위엄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다. 중국에서 건너왔지만 한국 궁궐과 학문 공간을 지켜온 나무로, 오랫동안 학자와 문인들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회화나무의 생태와 특징
회화나무는 콩과 식물로 원산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해 지금은 낯설지 않은 나무가 됐다. 공해에 강하고 병충해가 적으며 생김새가 단정해 가로수로도 심는다. 여름 7~8월에 피는 꽃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멀리서 보면 노란빛이 감도는 백색인데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느낌이다. 10월이 되면 콩처럼 생긴 열매가 맺히는데, 꼬투리가 바싹 마르지 않고 다육질이어서 다른 콩과 나무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독특한 열매는 한약재로 귀하게 쓰여 왔다.
꽃말은 망향이다. 그리움과 떠남의 정서를 담고 있어 문인들의 시에도 자주 등장했다.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회화나무, 홰나무, 회나무, 괴나무 등으로 불렸고 충청도에서는 호야나무라고도 불렀다. 명칭 때문에 화살나무속 회나무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궁궐과 학문 공간을 지킨 나무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수라 불렸다. 중국 주나라의 고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삼괴구극이라 하여 회화나무 세 그루와 가시나무 아홉 그루를 심어 정승과 고급 관료의 자리를 상징했다. 궁궐이나 고택, 향교와 서원 입구에 회화나무가 자주 보이는 이유다.
궁궐의 입구, 특히 창덕궁 돈화문 앞에 심긴 나무들은 장식물이 아니다. 「주례」 기록에 따르면 왕이 삼공과 관료를 맞이하는 자리에 회화나무를 심어 위계의 표지로 삼았다. 그래서 삼공의 자리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는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큰 학자가 난다고 하여 아무 곳에나 심지 않았고,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수형이 단정해 학자의 기개를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었다. 반대로 가지가 구불구불한 것을 두고 곡학아세의 풍자로 보기도 했다.
또한 이름의 한자 ‘槐(괴)’를 파자하면 목(木)과 귀(鬼)가 되는데, 이를 근거로 회화나무가 귀신을 쫓는 나무로 여겨졌다. 궁궐이나 고택에서 잡귀를 막는 역할을 맡았던 이유다.
약재와 생활 속 쓰임새
회화나무는 그 자체로 길상목일 뿐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쓰임새가 많았다. 꽃봉오리는 괴화라 불리며 지혈과 혈압 강하, 항염 효능이 있어 한약재로 쓰였다. 열매는 괴각이라 하여 열을 내리고 피를 식히며 출혈을 멎게 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현대에는 이소플라본 성분이 주목받아 갱년기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수요가 높다.
또한 루틴과 퀘르세틴 같은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풍부해 혈관과 항산화에 쓰인다. 이 성분은 기능식품뿐 아니라 화장품 원료로도 확장됐다. 피부 노화 방지, 진정 케어, 홍조 완화 등에 회화나무 추출물이 사용되고 있다.
목재 역시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해 건축재, 가구재, 도구 제작에 쓰였다. 수피와 잎은 염색 재료로, 꽃과 열매는 달여서 종이를 물들이는 괴황지로 만들어 부적에 쓰이기도 했다.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는 신성한 재료라는 믿음이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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