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한글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문자 이상의 존재다. 문자 체계의 기능을 넘어서, 한국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자긍심, 그리고 시대를 아우르는 지식 평등의 상징으로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한글이 우리에게, 그리고 세계인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의사소통'을 넘어 문화의 깊이와 인간 삶의 다양성까지 포괄한다.
1443년,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은 현실적인 고민을 안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공식 문자였던 한자는 왕과 지배층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의 도구'였다. 대부분의 백성은 읽고 쓰는 법을 익히지 못했고, 자신의 사연을 글로 남길 권리도 박탈당했다. 세종은 이 같은 언어적 불평등이 국민 삶의 질을 낮춘다는 점에 주목했다.
"나라의 말은 백성과 가장 밀접하다."
세종은 민중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창제하고자 했다.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는 과학성과 합리성, 민주성을 모두 겸비한 문자였다. 발음 기관의 원리를 반영한 자음 17자, 하늘, 땅, 사람의 삼재와 음양오행 철학을 담은 모음 11자, 총 28자로 설계된 문자 시스템은 세계 문자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체계적이고 독창적이었다.
이 혁신은 문자 발명을 넘어섰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당시 지배 질서에 대해 조용하지만 강력한 도전이었다. 중국 중심의 중세 한자 질서, 그에 따른 문화적 종속성을 넘어섬으로써, 조선 사회에 문화 자립과 정보 평등의 토대를 마련했다.
◇ 기록과 문화의 확산: 한글의 사회적 전환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은 사회 전반에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문해 능력을 확산시켰다. 구한말에는 한글로 소설, 요리책, 편지, 고소장 등 다양한 기록물이 등장했다. '홍길동전', '심청전'과 같은 민간 한글 소설, 여성 대상의 실용문 '음식방문'은 한글이 지식 평등과 생활문화 확산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문'이라는 공적 명칭을 얻었고, 최초의 국어 교과서가 편찬되며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글 사용이 억압받는 시기도 있었다. 당시 언어학자 주시경 등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하며, 일제의 언어 정책에 맞서 민중 언어의 체계성과 독립성을 지켜냈다.
한글의 창제는 정보혁명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아도 매우 독특한 의의를 가진다. 금속활자 인쇄가 이미 보급된 15세기, 세종은 문자 혁신을 통해 대중적 정보교환 시대를 여는 문명의 전환점을 그렸다.
한글의 음운학적 자질 체계는 기계적·알고리즘 처리에 이상적으로 설계돼, 현대 정보기술과의 궁합에서도 뛰어난 장점을 보인다. 자동번역, AI 음성인식, 빅데이터 분석 등 디지털 서비스에서 한글의 과학성과 규칙성은 혁신적 도구가 된다.
◇ K-컬처 시대: 한글, 세계로 연결되는 문화의 매개
한글은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정신, 사고방식을 이어온 토대이자, 21세기 들어 디지털 혁명과 한류 열풍을 타고 새로운 역할을 맡고 있다.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OTT 플랫폼의 확산으로 한글은 빠르게 세계인의 소통 도구가 되었고, BTS, K-드라마, 게임, 웹툰 등을 통해 콘텐츠와 한글은 서로의 가치를 증폭시키고 있다.
2025년 기준, 해외 한국어 학습자는 18만 명을 넘어섰고, 178개국에 한글학교가 운영된다. 구글 번역, 네이버 파파고 등 AI 기반 기술은 한글의 국제적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유튜브, 트위치,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한글로 된 콘텐츠와 댓글이 활발하고, 글로벌 팬들은 한글 자막, 가사, 이모티콘까지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한글은 창의성과 확장성도 지닌다. 밈(meme), 이모티콘, 초성어, 감정표현 등에서 한글은 세대별·문화별 독특한 언어 놀이 도구가 된다. 예술계에서는 한글 타이포그래피, 디지털 아트, 인터랙티브 콘텐츠 등 창작 영역에서 한글의 미적·기술적 융합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도 점점 한글 로고와 디자인을 마케팅에 활용하며 브랜드의 독창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한글이 디지털 시대에 맞는 문화 플랫폼으로 성장하려면, 언어 교육에서 벗어나 문화적 문해력과 감수성, 역사성까지 아우르는 접근이 필요하다. 온라인 한국어 학습 플랫폼, 실시간 번역 앱, VR·AR 기반 교육은 외국인이 한글을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디지털 아카이브와 빅데이터는 한글 자료의 보존과 활용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과속하는 디지털 변화 속에서 문법 파괴, 언어 단조화, 맥락 상실의 위험도 따르기에, 한글 본연의 체계성과 문화적 뿌리를 함께 관리하려는 지혜와 정책이 더욱 중요하다.
정리하자면, 한글은 15세기 세종이 실현한 사회적·지식적 평등의 상징이자,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은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한글이 정보혁명과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다시금 부각되는 이유는 바로 '누구나 쉽고, 깊이 있는 의미를 나눌 수 있는 문자'라는 본질적 특성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한글은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 일상과 예술, 기록과 놀이를 모두 아우르는 살아 있는 문화의 실천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한글은 더욱 새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세계인의 일상과 상상력에 스며들며, 21세기 한국 문화의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 디자인 컴퍼니 (주) 카우치 포테이토 대표이사.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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