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거나 흔들리는 현상은 역사의 퇴행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스 민주주의 역사 자체가 굴곡과 위기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나는 18여년 전 올리브 나무로 둘러쌓인 신성한 숲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파르테논 신전을 향해 올라 갔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그 길은 고대의 여행객들, 로마의 정복자들, 현명한 아랍인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 그리고 바이런을 비롯한 근대의 수많은 시인 묵객들... 이제는 서유럽 고등학생들의 수학 여행지로서 2500년 동안 서유럽인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필수 방문지' 입니다.
입장료를 내고 조금 오르면 왼쪽에 날개없는 니케 신상터가 나타납니다. 이 니케 신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흔히 니케상에 날개를 달았지만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날개를 떼어 내어 '아테네에 영원한 승리가 남기'를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너무도 일찍 무너집니다. 마케도니아에 의해 점령당한 후 로마, 비잔틴, 오스만 터키에 무려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식민지인으로 2류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국가의 번영과 안전은 기도를 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받을 수 없는 법이지요. 자신들의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세워진 그 니케상은 날개도 없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니케 신상터를 지나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신성한 문으로 들어 가는 5개의 거대한 기둥들인 프로퓔라이아가 우리를 맞습니다. 불교 사찰의 일주문과 같은 곳이지요. 빅토르 위고는 이 기둥들을 본 다음 이렇게 표현했지요.
"거대한 거인이 두 팔 벌려 나를 맞고 있다"
경건하게 숨을 고르고, 승리의 제물을 가득 담고서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던 파르테논 신전의 입구,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연신 찍어대는 장소입니다. 중앙문은 신성한 행렬이 지나가고 일반인들은 양 옆에 있는 좁은 문을 이용했다지만, 지금은 소란스러운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이 기둥들을 통과하면 드디어 고대 아테네인들의 거대한 힘의 부적이요, 원천이었을 파르테논 신전이 드러납니다. 빙 둘러 시가지를 굽어 보는 156미터의 높고 평평한 암반 위에 서 있는 당당한 신전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숭고해 보이는 허물어진 기둥, 부도들의 잔재, 흠집난 동상들, 하늘의 무한한 광활함, 고대문명의 그 원형적 특성들이 퍼즐 조각처럼 널려 있습니다.
이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80년 경의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당했다가 아테네인들이 살라미스에서 승리를 거둔 후 훨씬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재건한 것입니다. 새로운 파르테논 신전은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에 의해 기원전 447년부터 432년까지 약 15년에 걸쳐 완성되었지요. 이 때가 아테네의 최전성기로 민주주의가 만개하는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황금기 속에 파멸의 싹이 자라고 있었으니, 곧 이어 스파르타와 길고 끔찍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는 힘을 잃게 되고, 그리스 전체가 비극을 맞는 발단이 됩니다.
그 당시 파르테논 신전 내에는 여신 아테나의 훌륭한 조각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전의 이름은 여신의 이름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라는 뜻)에서 유래했지요. 아테네 신상은 12m나 되는 거대한 상으로 전신이 황금과 상아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빛나던 신상도 동로마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불에 녹아 사라졌습니다. 아마 녹여서 동로마 제국 귀부인들의 장신구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영원한 처녀의 집인 파르테논 신전도 2100년 동안 아크로폴리스를 지켜 왔지만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에 의해 때로는 그리스정교 교회로,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687년 베네치아군의 봉쇄 때 포탄이 명중해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 내 저장해 놓았던 폭약이 터져, 신전 내부와 지붕이 파괴되어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상태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얀색 집들로 덕지덕지 붙은 아테네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아크로폴리스에서 2500여년의 역사를 되새겨 보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저술가들의 책,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그런 역사적 인물들이 없었다면 아테네는 고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화와 철학, 문학의 빛이 각각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더 이상 그리스의 것이 아닌 서유럽의 찬란한 뿌리가 된 것입니다. 아테네 시는 독립 당시에 300여 채 밖에 없는 한가한 어촌 정도였다니 참으로 역사무상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 역사 역시 파르테논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 문명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수많은 인재의 출현으로 꽃을 피운 것은 페르시아 전쟁부터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50여년간(BC 480-BC 330)입니다.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자유와 문화를 지켜 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리스로 하여금 지중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유럽문명의 본질을 결정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광도 잠시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 1829년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을 얻을 때까지 2천년이 넘도록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그 뒤로도 1973년까지 바이에른과 덴마크로부터 왕의 수입, 군사 쿠테타 등 민주주의로 돌아오기까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겪었습니다.
그리스는 민주주의 등 유럽문화의 시조요 뿌리였지만, 많은 유럽국가들이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근대 유럽을 만들어 갈 때도 이 대열에 가장 늦게 합류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고통과 피눈물은 국기에도 반영되어 있는데요. 그리스의 국기는 푸른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는 청색과 하얀 파도와 순수를 나타내는 흰색의 9줄로 되어 있습니다. 이 9줄은 독립전쟁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9구절을 상징합니다. 옆에는 흰 십자가로 그리스정교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국기에도 처절한 외침,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배어 있다는 사실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자리를 향해 쭉 걷다 보면 아테네 시내를 내려다 보는 전망대에서 펄럭이는 그리스 국기가 그냥 국기로 보이지 않습니다.
2025년 우리 역시 질곡을 거쳐 힘들고 어렵게 찾은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키는 길은 우리 각자가 깨어 있고 책임감을 가질 때야 비로소 가능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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