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김종효 기자 | 정부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35조3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지난해 29조6000억원보다 19.3% 늘어난 사상 최대 규모다. R&D 예산 삭감의 그림자에서 빠르게 벗어나 ‘혁신 성장’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됐다는 기대와 동시에 정책의 실질 효과를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정부는 재정 긴축과 중복투자를 이유로 주요 R&D 예산을 크게 줄였다. 그 결과 4000여건 R&D 과제 중단, 수천명의 연구인력 해고 사태가 발생했으며 이 파장은 기술 창업 생태계에 직접적 타격을 줬다. 실제 AI 의료분석 벤처, 반도체 스타트업 등은 자금난으로 핵심 인력의 절반 이상을 내보낸 곳도 있다.
이번 예산 증액 핵심은 미래 전략산업 분야 선제 투자다. 정부는 AI, 반도체, 신약, 모빌리티 등을 주력으로 하는 ‘기술주도 성장’과 인재 양성, 기반 연구, 출연연 지원 확대에 힘을 쏟는 ‘모두의 성장’이라는 양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AI 분야 예산 급증이다. 지난해 2조3000억원이었던 AI 예산은 4조7000억원으로 두 배 넘는 증가를 기록했다. 증액분 2.4조원은 초거대 AI 개발, AI 반도체, AI 데이터센터·슈퍼컴 인프라, AI 신약 설계, 로보틱스 융합 등 첨단 실용 프로젝트에 대거 투입된다. 정책실 관계자는 “AI 핵심 기술에 대한 선제적 R&D 집약투자가 글로벌 경쟁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 자신했다.
과학기술 출연연과 연구자 커뮤니티 등 현장에선 “재정적 버팀목이 복구됐다”며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감원 충격에서 벗어난 벤처 업계에는 사업모델 복구 및 글로벌 확장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례로 현대차 계열의 자율주행 솔루션 기업 포티투닷은 “정부 도시교통 빅데이터·AI모빌리티 과제에 재진입하며 신사업 진출이 본격화됐다”고 밝혔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AI 슈퍼컴 실증센터 구축사업 공모 준비에 본격 착수했다. 스타트업 업계는 연구직 인력 재채용, 해외 시장용 서비스 개발 투자를 재개하는 분위기다.
이에 발맞춰 중소벤처부는 창업 7년 이하 ICT·AI 등 유망 기술기업 지원 예산을 최대치로 늘려 R&D·투자유치·사업화 연계 패키지를 확대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정부 주도의 국산화 및 풀스택 구조에 따른 한계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정부 정책이 특정 AI 프레임워크, 국산 반도체 인프라만 고집하면 글로벌 오픈소스·클라우드 활용에 제약이 생기고 연구 선택지와 혁신 실험이 좁아진다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
AI 음성 인식 스타트업 관계자는 “글로벌 협력 없이 내수중심 R&D만 강화하면 실제 산업 파급력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오픈AI, 구글 딥마인드, 엔비디아 등 글로벌 선도 기업들이 개방형 생태계를 확대하는 가운데 한국만 지나치게 자국 중심 프레임에 갇힌다면 기술 유연성과 적용 가능성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이번 예산 증액이 숫자 자체의 임팩트에 비해 실제 정책 생태계의 ‘유연성’ 확보 여부가 장기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중복투자로 인한 효율성 문제도 제기된다. 지방정부 간 AI 클러스터 경쟁이 구조적 분산의 시그널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경기(판교), 광주, 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가 데이터센터·AI 특화단지 조성 사업을 각각 따로 추진해 대형 예타사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 중이다. 전문가들은 “국비·지자체비로 중복투자가 무분별하게 이뤄지면 파편화·비효율로 인해 오히려 글로벌 규모의 집약 투자에 밀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이에 따라 ‘자율성 있는 지자체 분업’, ‘인프라 통합관리’ 등으로 투자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른다.
이외에도 정부 R&D 예산은 출연연·대형 프로젝트에 몰립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테스트베드, 수익화 실증 지원 같은 상용화단계 스타트업 지원은 사각지에 머무른다는 지적이 업계 현장에서 쏟아진다. 예산 배분 구조도 ‘원천-기초-상용화 연계’라는 명분 하에 대형 연구기관·연구사업 위주로 움직여 중소 벤처 현장 요구와 간극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산업·정책 현장에서는 R&D 예산 증액 자체가 혁신 일정과 심리 기반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의견과 실제 혁신 성과는 예산의 효율 집행, 민간 다양성과 인프라 유연성 확보, 지역별 역할분담 등 구조적 개선에 달려 있다는 다층적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스타트업들은 ▲정부-지자체, 중앙-민간 연계 강화 ▲사업화 연계 집중투자 ▲테스트베드 확충 등을 정책 개선 우선과제로 꼽고 있다. 정책의 유연성과 패키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업계 전문가는 “R&D 예산 증액은 연구생태계 전반의 회복과 혁신 산업 도약을 위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라면서도 “정부가 목표로 삼는 ‘기술주도 성장’과 ‘모두의 성장’이 성과를 거두려면 민간과 정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제도적 보완 없이는 ‘역대 최대 규모’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현장 체감도가 반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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