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과격 외교 행보는 세계적으로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만들었다. 패권국의 일방적이고 돌발적인 정책 결정이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가운데 각국은 자국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전례없이 정교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구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한미동맹을 외교와 안보의 근간으로 삼는 한국의 경우 한미동맹 관리를 위한 정교한 외교는 국가적 생존과 번영에서 중대 과제다.
외교를 잘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가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국제 관계를 움직이는 힘의 배치와 지형, 즉 지정학적 요인을 제대로 읽어내야 외교적 전략과 전술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바로 타이밍이다. 지정학적 이해는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국제 정세 진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국제 정세 관찰에서 시점에 따른 변화를 간파하고 그에 맞게 전략과 전술을 조정할 때, 즉 시정학(時政學)이 가미돼야만 외교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
지정학은 그 자체로 정태적이고 고정적이다. 대륙과 해양의 지형, 국가 간의 군사적·경제적 배치, 역사적으로 형성된 동맹과 갈등 구도가 그 예다. 그러나 국제 정치는 유동적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시점, 경제 흐름, 지도자의 정치적 상황 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외교는 이 두 요소―고정성과 유동성―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 예술이다. 구조적 이해와 시기적 감각을 결합하지 못하면 효과적인 전략이 나올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 앞선 일본을 방문한 것은 타이밍 차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국 외교는 지정학적으로 분단 구조에 영향을 받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복합적인 압력을 받게 돼 있다. 이런 구조에서 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미국이 강조하는 동맹 네트워크 관점에서 한국이 ‘협력의 고리’로서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둘째, 이 대통령은 취임 이전에는 반일 성향이 있다는 평가가 존재했던 만큼 파격적 일본 방문 일정은 한국 외교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셋째,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 경험이 있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의 면담을 통해 한미 정상회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서 과거사 문제가 크게 거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제기한다. 과거사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에서 유래된 갈등 요소가 미래에 발현하는 협력 요소를 가로막는 것은 현명한 외교가 아니다. 만약 과거사 해결을 전제로 일본의 양보를 압박했다면 한국의 외교적 공간은 오히려 좁아졌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맥락에 따라 다루는 방식의 지혜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 총리가 1998년 공동선언을 통해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한 것은 시대적 맥락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경우다. 반대로 과거 정부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사 정리와 실용적 협력을 병행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한 것도 시기와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외교는 정확한 지정학적 진단 위에 순간을 포착하는 시의적절한 결단이 결합돼야 한다. 지정학이 외교의 지도라면 타이밍은 시계와 같다. 하나의 고지 점령 작전을 준비할 때 고지의 지형을 알아야 하지만 낮에 공격할지 밤에 공격할지에 대한 고려가 없으면 전투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다거나 지정학은 무의미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과 시정학 두 가지가 맞물릴 때 비로소 외교가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 외교가 앞으로도 신중한 진단과 시의적절한 결단을 통해 지정학과 시정학을 함께 활용하는 전략을 이어간다면 이재명 정부와 대한민국의 미래는 훨씬 안정적이고 활기찬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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