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이하 현지시간)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오는 10월말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 의사를 밝히며 한국을 방문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의 '피스메이커'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북미 정상회담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은 낮지만 APEC을 계기로 제3의 장소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앞서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할 경우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과 다시 만날 가능성에 주목한 바 있다.
李, 트럼프에 "김정은 만나달라" 북미정상회담 요청
"한반도 피스메이커 되어 달라…나는 페이스메이커"
이날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세계 지도자 중에 유럽, 아시아, 중동 등 전 세계의 평화 문제에 (트럼프) 대통령님처럼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실제 성과를 낸 건 처음"이라며 "피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이 정말 눈에 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도 평화를 만들어달라"며 "김정은도 만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트럼프월드도 하나 지어서 저도 거기서 골프도 칠 수 있게 해주시고 세계사적인 평화 메이커 역할을 꼭 해주시길 기대한다"며 "대통령께서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이 대통령의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을 흡족하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가자 전쟁과 세르비아-코소보, 르완다-콩고민주공화국, 이집트-에티오피아, 캄보디아-태국, 인도-파키스탄 분쟁에 중재 외교를 벌여왔으며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가능성도 커진 상태다.
하지만, 미국 내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성과를 그다지 조명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과를 직접 거론하며 '피스메이커'라 부른 것이다.
현지 언론도 이 부분에 주목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 리모델링과 전 세계 평화중재 노력 등에 대해 칭찬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을 웃게 했다"고 보도했다.
AP통신도 "트럼프 대통령의 SNS 게시글로 우려됐던 적대적인 회담 가능성은 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향해 칭찬을 쏟아내면서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로이터 통신 역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백악관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이 사용해온 익숙한 전략을 활용해 골프 이야기를 하고 집무실 인테리어와 평화 중재 능력을 칭찬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연내 김정은 만나고 싶다" "한국과 함께 큰 진전 이뤄나갈 것"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트럼프 월드' 제안에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는 한국과 함께 큰 진전을 이뤄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며 "당신은 내가 함께 일해 온 한국의 다른 지도자들보다 그것을 하려는 성향이 훨씬 더 있다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 시절 개최했던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한 점을 상기시키며, 당시 자신과 김 위원장의 관계 개선이 올림픽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북한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여서 표가 팔리지 않았다"며 "나는 김정은 위원장과 관계를 형성해가던 단계였고 '로켓맨' 같은 위험한 말도 오갔는데 그러다가 어느날 (김 위원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대화를 시작했는데 김 위원장이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영리하게 말했다"며 "그 통화로 올림픽은 엄청난 성공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을 조속히 추진하겠다는 뜻도 여러 차례 내비쳤다.
그는 '올해 아니면 내년에 김 위원장을 볼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래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도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시절에 김 위원장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나는 그와 매우 잘 지냈고, 우리는 (1기 집권 시절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며 "만약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이겼다면, 핵전쟁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APEC, 트럼프·시진핑 참석 가능성 커져…한·미·북·중·일, 한자리에 모이는 외교 큰 장 열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만간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 위해 방중을 할 것이라며 이 대통령을 향해 "같이 가겠느냐. 같이 방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전용기에 탑승하면 연료를 절감해 오존층 파괴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농담을 건넸다.
이 대통령이 "같이 가면 좋겠다"고 답하자 트럼프 대통령도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저희가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이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트럼프 대통령은 "갈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참석할 경우 김 위원장이나 시진핑 주석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이 대통령이) 만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인가"라며 "어려운 질문이지만, 김 위원장과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상당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참석 의사를 보이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 여부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중국 특사단은 지난 24일 중국 외교부장인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을 만나 이 대통령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앞 친서를 전달하며 APEC에 시 주석을 정식으로 초청했다.
외교가에서는 시 주석이 이번 정상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즉,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정상이 한 자리에 모이는 다자외교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만일 김정은 위원장까지 참석한다면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실 "김정은 APEC 초청, 트럼프 참석 여부와 연동될 듯"
정동영 "한미 정상, '한반도 평화전략' 인식과 방법론 일치"
일단 대통령실은 북한의 APEC 참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모습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올가을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초청했고, 가능하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도 추진해 보자고 권했다"며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슬기로운 제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대통령의 제안을 여러 차례 치켜세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APEC 정상회의에 북한을 초청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온다면 여기서 김 위원장과 만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선후관계가 있는 제안이라 서로 연동돼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예측"이라며 말을 아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APEC에 참석할 가능성은 낮게 봤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참석차 방한하는 계기를 북·미 정상이 만날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장관은 "조속한 북미 정상회담 재개를 기대하게 된다"며 "(북미 정상회담 재개를 위한)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한·미 정상회담 결과와 관련해서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이 대통령의 적극적인 제안이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화답했다"며 "한미 정상이 한반도 평화전략에 관해 인식과 방법론이 일치한 것"이라고 밝혔다.
北, 트럼프에 응답할까? "평양 골프장 아주 훌륭" 때맞춰 사진 올려
관건은 북한의 호응 여부다. 최근까지 북한의 담화 내용을 감안하면 북한이 남한과 대화를 할 의지는 없으나 미국과는 대화를 할 생각이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대남·대미 담화에서 비핵화 불가론을 강조하면서도 "나는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대통령사이의 개인적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자신들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대화 조건'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근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대응도 이전과 달리 수위가 낮다는 평가다.
과거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북침전쟁 연습'이라고 비난하며 각종 탄도미사일 등 핵 전력을 동원해 반발성 도발을 단행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 23일 김정은 위원장 참관하에 개량된 두 종류의 신형 반항공미사일(대공미사일)의 사격훈련을 진행했으나 이 사실을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는 공개하지 않았다.
북한 주민들이 미사일 발사 소식을 알 수 없게 해 내부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호전적 분위기 조성을 피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 골프장' 발언이 나온 가운데 북한 측이 평양 골프 관광을 홍보한 것도 눈길을 끈다.
26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최근 평양에서의 골프관광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조선에서도 관광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관광 유형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신보는 평양골프장과 서산골프연습장을 거론하며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온화한 기후조건으로 하여 골프관광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췄다"고 소개했다.
정청래 "트럼프월드 발언에 트럼프 귀 번쩍 띄었을 것"
박지원 "이 대통령 '피스메이커' 언급은 신의 한수"
정치권에서는 이 대통령의 '피스메이커' 발언이 북미정상회담의 출발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트럼프 대통령을 세계적인 평화전도사(피스메이커)로 상찬하고 북미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면서 "아마도 이 대통령의 '북한에 트럼프 월드를 지어 골프를 치게 하자'는 발언에 트럼프의 귀가 번쩍 띄었을 것이다. 정치를 비즈니스처럼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굿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대통령의 피스메이커-페이스메이커 명언은 전략적인 발언이고 협상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면으로 매우 높이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정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곧바로 좋아하면서 올해 안에 김정은을 만나고 싶다는 반응을 이끌어 낸 것은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10윌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다면 북미대화에 대한 어떠한 적극적인 언행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하노이 노딜 이후에 다시 한번 북미대화가 재개된다면 한반도 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이재명 대통령께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전 세계 피스 메이커로서의 공헌을 언급한 것은 신의 한 수로 보인다"고 했다.
박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가 연내 김정은을 만나고 싶다는 언급, 트럼프의 APEC 참석도 재확인하는 소득을 이끌어 냈다"며 "어쩌면 트럼프의 꿈인 노벨평화상 수상도 그려진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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