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식지 않는 열풍, K-콘텐츠 새 지평 열어
전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열풍이 식지 않고 있다. 넷플릭스 공개 이후 두 달이 지났음에도 시청 순위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영화 부문 역대 1위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인 ‘골든(Golden)’은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 1위에 이어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도 1위에 올랐다. K팝(K-POP) 여성 가수의 노래가 빌보드 싱글 1위에 오른 건 최초다.
독특한 소재에 담긴 보편적 메시지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K팝 슈퍼스타들이 악귀와 싸우는 이중적 세계를 그린 액션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헌트릭스’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팝 걸그룹 멤버이자 악령을 물리치는 숨은 영웅들로 등장한다. 한편 헌트릭스와 경쟁을 벌이는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더 진우는 남성 아이돌 캐릭터로, 그가 맡은 저승사자 역할은 K팝과 전통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깊이를 더했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빨을 드러낸 악마와 강렬한 K팝, 다채로운 액션을 몰아치듯 선보인다. 글로벌 팬층을 보유한 ‘K팝’과 악마와 무속을 포함한 ‘K-오컬트’에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의 제작 노하우가 잘 버무려졌다는 평가다. 뉴욕타임스(NYT)는 “어쩐지 유치한 로그 라인을 뒤로하고서라도, 영화는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면서 “제대로 활용된 음악과 눈길을 사로잡는 미술적 소재, 그리고 몰입감 있는 액션 시퀀스는 역동적인 스토리텔링을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K팝의 역할이 가장 크다. 영화를 쓰고 연출한 매기 강 감독은 “데몬 헌터스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을 찾던 과정에서 ‘K팝’을 떠올렸다”고 했다. 사실상 영화의 마지막 조각이었던 셈이지만, 한국인이 만들고 부른 노래와 팬 사인회, 응원봉 등 팬덤 문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영화 속 ‘K팝’은 케데헌이 가진 정체성이자 작품 흥행의 핵심 요인이 됐다.
여기에 영화는 K-오컬트라는 전통문화를 융합시켜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영화에는 도깨비와 물귀신, 저승사자와 같은 K-귀신이 등장하고, 데몬 헌터스의 시초도 한국의 무당으로 소개한다. 강 감독은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려던 중,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이 한국의 풍부한 신화였다”고 전했다. 작품 곳곳에는 한국적인 디자인 요소가 살아 숨 쉰다. 헌트릭스의 상징적인 응원봉은 한국 전통 장신구인 ‘노리개’ 매듭에서 영감을 받았고 한국 전통 무기를 응용한 설정들도 눈길을 끈다.
K팝 걸그룹과 퇴마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달리 서사의 구조는 보편적이다. 결핍을 가진 주인공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 이야기다. 그 속에 좌절과 용기, 우정과 희생, 무엇보다 자기 확신을 찾아가는 개인의 성장이 담겼다.
자연스럽게 담아낸 ‘한국스러움’
‘케데헌’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면서 한국 문화를 다루는 최초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영화다. 매기 강 감독은 “모두 한국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모두 한국 스타일로 생각하며 작업했다”고 전했는데, 이처럼 작품은 집요하게 ‘한국스러움’을 담아냈다. 등장인물의 복장은 물론 서울의 거리와 한국 음식과 같은 모습을 넘어, 수저를 놓을 때 냅킨을 먼저 까는 것 등 한국인만이 알아챌 수 있는 작은 요소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소위 ‘국뽕’ 코드를 넣지 않았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국적 소재를 세밀하게 구현하는데 충실했다. 고음 발성에 실패한 루미가 멤버들과 설렁탕을 먹으며 위로받고,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기로 한 뒤 후반부에 멤버들과 처음 대중탕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푸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K-코드’가 한국인들에겐 과하지 않고, 해외 관객들에겐 새롭지만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K팝 문화도 잘 보여줬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가 사인회를 열고 팬들이 열광하는 모습과 오색 찬란한 불빛이 들어오는 응원봉 및 휴대폰 LED 전광판, 플래카드를 들고 이들을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을 통해 K팝 응원 문화를 표현했다.
콘텐츠가 이뤄낸 성공은 새로운 문화 현상도 만들고 있다. 영화 속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의 춤을 따라 하는 챌린지가 쏟아지고, 삽입곡 ‘골든’의 고음이 폭발하는 하이라이트 구간에 도전하는 가수들의 커버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관련 상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애청자들도 늘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가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방문객 수도 급증했는데, 올해 상반기 국립중앙박물관의 방문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4% 증가한 270만 명을 기록해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20년 만의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서울 도심 전통 소품 가게 골목, 한복 대여점도 전에 없던 활기를 띠고 있다.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문화 요소들이 외국인 관광객의 관심을 끌며 콘텐츠에서 발견한 문화를 실제로 체험하려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서울의 주요 명소들이 주목받으며 온라인상에서 다양한 콘텐츠도 우후죽순 퍼지고 있다.
미국·영국 양대 팝 시장 석권
음악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실제 성우진(E JAE, 오드리 누나, REI AMI)과 프로듀서 테디가 참여한 메인 OST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에 오르며 팝 시장을 석권했다. 지금까지 이 차트에서 정상에 오른 K팝 가수는 방탄소년단(BTS)이 유일하다. 그룹 활동으로 여섯 차례 1위를 차지했고, 멤버 지민과 정국이 각각 솔로곡으로 정상에 올랐다. 앞서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도 1위를 기록해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이후 13년 만에 K팝이 이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번 순위가 주목받는 건 K팝 팬덤의 응집력을 보여주는 실물 음판 판매량 등이 아닌 대중적인 인기 지표인 스트리밍에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핫 100’의 경우 미국 스트리밍 데이터, 라디오 방송 점수(에어플레이), 판매량 데이터를 종합해 순위가 산출된다. 통상 K팝 히트곡이 강력한 팬덤에 따른 실물 음반 판매량이나 다운로드에 기반하는 것과 다르게, 대중적인 인기 지표로 볼 수 있는 스트리밍에서 성과를 낸 것이다. 서구 어린이와 10대들 사이에선 디즈니의 ‘겨울왕국’에 열광했던 것처럼 ‘케데헌’에 흥분하고 있다. 미국 유아들이 단체로 수록곡들을 부르는 영상이 잇따라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고, 해외 싱어롱 상영회는 연일 매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OST 열풍을 업은 ‘케데헌’은 내년 아카데미상까지 노리고 있다. 넷플릭스는 ‘골든’을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 후보로 출품할 계획이다. 아카데미는 공식 소셜 미디어에 “헌트릭스는 세상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내 스포티파이도 구했다”고 글을 남기며 이례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한국 문화를 촘촘히 입힌 해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성공은 한국 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무엇보다 기존 K팝 팬덤 외에 새로운 소비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케데헌 제작에 관여한 짐 로포 리퍼블릭 레코드 회장은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케데헌은 이전에 플랫폼에서 K팝 콘텐츠를 시청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에게도 어필하고 있다”며 “더 이상 ‘K-팝 현상’이 아닌 ‘팝 문화 자체’의 새로운 중심”이라고 평가했다. 댄 린 넷플릭스 영화 부문 총괄 역시 “젊은 여성 관객과 K팝, 애니메이션 팬들의 관심은 예상했지만 더 넓은 연령층에게 사랑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어른들은 친구나 가족, 아이들은 형제자매와 함께 케데헌을 시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케데헌’과 ‘골든’의 성공이 최근 주춤하던 K팝 시장의 재도약 발판이 되어 새로운 방식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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