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대외협력기금(EDCF)의 아프리카 현지 사무소에서 근무하다 보면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지원 가능 여부를 묻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어느 날 외진 지역을 대표하는 한 국회의원이 탄자니아 사무소를 찾아왔다. 그는 지역에 모자병원(Mother and Child Hospital)을 지어 달라고 했다. 현재 병원은 한 곳뿐인데 시설이 낙후되고 임산부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며칠을 걸어 온 임산부가 대기 줄이 길어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나 길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많다고 했다. 모자병원 건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보기술(IT) 분야에 경쟁력을 가진 한국 기업은 또 다른 제안을 한다. 아프리카의 고질적인 부정부패가 정보 독점과 정보 비대칭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들은 교통 범칙금, 세금과 공과금, 전기·수도 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의 납부를 전산화하는 행정 시스템을 지원해 달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전력 접근성은 평균 20∼30% 수준이다. 단전이 잦아 제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 전력 부족은 삶의 질도 떨어뜨린다. 이에 따라 발전, 송배전 사업은 원조기관들이 최우선으로 지원하는 분야다.
농수축산업 관련 부처는 다른 요청을 한다. 식량 자급자족을 이루기 위해, 불균형의 영양상태로 인한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다와 접한 국가라면 풍부한 어족 자원을 좀 더 활용하기 위해 저마다 농업·수산업·축산업 지원을 요청한다.
이들 국가의 공식 실업률은 대체로 20% 이하다. 하지만 실제 체감 실업률은 40% 이상으로 느껴질 만큼 주변에 실업자가 많다. 현지 산업부 장관들은 제조업을 키우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해 고용을 늘리기 위해 산업단지 조성 지원을 요청한다. 교통 분야 관계자는 다른 문제를 지적한다. 물류비용이 많이 들고 교통 인프라가 열악해 국가 발전이 어렵다고 말한다. 이들은 항공, 도로, 교량, 버스 등 교통인프라 사업 지원을 검토해 달라고 한다.
오염된 호수나 강에서 물을 마시거나 멀리서 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은 수인성 질병에 시달린다. 이에 따라 수명이 짧아지는 현실을 아는 이들은 상수도 사업을 먼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상황을 보면 신재생 에너지 사업도 필요하다. 불법 제조 석유에서 나오는 검은 배기가스로 스모그가 심각할 때는 석유검사소를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많은 아프리카 사람은 낮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으로 오랫동안 자존감이 낮아져 있다. 문화적 자부심을 키울 수 있도록 박물관을 짓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하나 급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사업은 없다. 왜 이런 기본 인프라를 현지 정부가 자체 예산으로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자.
양국이 EDCF 지원 사업으로 확정하기까지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지원 필요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지 이해관계자들이 사업을 진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상대 기관이 사업을 관리할 역량이 있는지도 중요하다. 부정부패에 연루될 가능성은 없는지, 무력한 시민이 피해를 볼 사업은 아닌지, 환경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는지 등을 검토한다.
또 우리 기업이 현지에서 사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기술과 경험, 네트워크를 갖췄는지도 중요하다. 완공 후에도 현지 정부가 시설을 잘 관리해 초기 목적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이 판단은 쉽지 않다. 혹시 이 사업으로 인해 EDCF가 비난받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울 때도 있다. 그런데도 1%라도 협력국 발전에 도움이 되고 우리나라와 협력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사무소의 일이다.
사업은 초기 발굴부터 완공, 사업평가까지 보통 10년이 걸린다. 하지만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 근무 기간 담당했던 대부분의 사업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가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회의감은 개발협력 업계 종사자가 흔히 겪는 어려움이다. 그럴 때마다 탄자니아 사무소 근무 시 맡았던 탄자나이트(Tanzanite) 해상교량 사업 경험이 큰 용기를 준다.
2017년 탄자니아에 부임했을 때 이 사업은 문제가 많았다. 먼저 타당성 조사에서 연약지반 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예측한 사업비와 실제 사업비에 큰 차이가 생겼다. 차관 계약서상 초과 비용은 탄자니아 정부가 부담해야 했다. 하지만 탄자니아 정부는 만성적인 예산 부족으로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경제중심지 다르에스살람에 위치한 교량 북단이 유럽 대사관저가 밀집한 지역에 있었다. 교량 건설로 연결도로 차량 통행이 늘어나면 주변이 혼잡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대사관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대사관에 부정적 의견을 전달했다. 거액의 차관으로 결국 부유층 차량 통행만 늘리는 해상교량 사업보다 서민들에게 좀 더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사업을 발굴하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시내 중심을 지나는 도로 확장 사업이 교통혼잡을 완화할 수 있는데 도심을 우회하는 해상교량은 교통 완화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굳이 교량을 지어야겠다면 대사관저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다시 설계하라는 요구까지 이어졌다. 우리 대사관은 이런 우려를 이전 소장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전임 소장은 양국 정부가 추진하기로 합의한 사업이라 탄자니아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중단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러한 사무소의 대응으로 전임 대사와 관계가 불편해졌다고 들었다. 다행히 내가 부임했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시 대사는 탄자니아 정부의 결정을 바꾸기 어려운 우리 입장을 이해했다. 결국 EDCF는 보충 융자를 통해 사업 완공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 대사를 통해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유럽 대사관은 다른 경로를 택했다. 한국인이었지만 미국으로 귀화한 주탄자니아 미국대사가 부임하자 같은 민원을 제기했다. 이 미국 대사는 EDCF 사무소를 찾아왔다. 그는 유럽 대사관으로부터 들은 주장을 반복했다. 이 교량이 보기만 좋고 제대로 활용되지 않아 결국 '화이트 엘리펀트'(white elephant·흰 코끼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표현은 유지비가 많이 들고, 폐기하기 어렵고, 결국 소유자에게 별 쓸모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이 사업 컨설턴트 엔지니어를 불러 설명을 요청했다. 왜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 확장이 어려운지, 이 해상교량이 실제로 얼마나 교통 혼잡을 완화할 수 있는지, 왜 교량과 연결된 도로 경로를 바꾸기 힘든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상대가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사업 준비기간 동안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시공사 우선협상 대상자가 사업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시공사 현장 사무소에 강도가 침입한 사건도 발생했다. 착공식 행사를 위해 도로청이 베어버린 나무를 두고 복원하라는 민원이 제기됐다. 면세 이행이 지연돼 시공사가 자금 압박을 받기도 했다. 설계 변경을 두고 컨설턴트와 시공사 사이에 충돌이 생기기도 했다.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필자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2020년 초 한국으로 귀임했다. 후임 소장을 통해 결국 2022년 교량이 완공되고 개통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현지인, 교민, 주재원과 연락할 때마다 이들은 "'탄자나이트 다리'로 30분 걸리던 길을 10분 만에 갈 수 있게 됐다"며 만족해했다. 또 "아침에 유럽 대사관 사람이 교량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본다"고 알려주고, "밤이 되면 교량에 불이 켜져 우리나라 광안대교처럼 아름다워 현지인들이 산책하며 사진을 많이 찍는다"와 같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프리카는 인프라가 부족하다. 이곳에서 어떤 EDCF 사업이 효과적인지 스스로 묻곤 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준비부터 평가까지 평균 10년 동안 수백명이 각자 역할을 맡아 사업에 참여한다.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길지 그 문제가 얼마나 영향을 줄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수백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면 눈에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업의 효과성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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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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