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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지난 91년간 (부방은) 실패도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길을 모색해왔습니다.”
이동건(87) 부방그룹 회장은 부방그룹의 끊임없는 변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부방그룹의 뿌리는 부산을 대표하는 장수 섬유기업 부산방직이다. 1934년 일본 제국제마직포공장이 부산에 설립했던 것을 이동건 회장의 부친인 이원갑 창업주가 1949년 인수해 ‘부산방직공사’로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방직은 순모, 캐시미어, 알파카, 앙고라, 모헤어, 케멀 등의 특수 모직물 및 기타 소모, 방모 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1976년 이동건 회장이 삼신공업사를 창립하며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삼신공업사는 국내 전기밥솥 산업의 원조격이다. 1970~1980년대부터 삼성·LG·대우 등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며 국내 최대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자체 브랜드 ‘리홈’, ‘쿠첸’ 등을 앞세워 밥솥, 전기다리미, 살균건조기 등 다양한 생활가전 라인업을 구축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선박평형수 처리장치(테크로스) 등 친환경·첨단사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에 등극했다. 부방은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며 글로벌 1등 기업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동건 회장은 “직물은 사양산업이라고 판단해 다양한 도전을 이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지는 일본대학 법과를 중퇴하고 귀국해 금융기관에서 몸담았다. 광복 이후에는 동해철공, 경주흥업, 조선제마방적 등을 경영했는데 이런 경영 실적을 인정받아 1953년 일본인이 세운 적산기업인 제마방적을 불하받았다. 제마방적은 일본 도쿄에 본점을 두고 제국제마 부산제포공장으로 1934년 설립됐는데 선친은 1953년에는 법인을 설립해 부산방직공사로 개칭했다.
부산방직은 다른 귀속 사업체들과 달리 회사 설립일을 불하받은 날로부터 설정하지 않고 원래 일본인이 세웠던 연월일을 그대로 사용했다. 올해로 91주년을 맞은 것도 이런 연유다. 이전부터 일하던 근로자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고 이들이 같은 곳에서 계속 일하며 기술을 발전시키며 회사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경영철학은 ‘신뢰와 투명 경영’이었다. 단 한 번도 가공비용이나 인건비를 미룬 적이 없었다. 담당자에게는 전권을 위임해 소신껏 일하게 했다. 직원들이 신이 나서 일하니 노사분규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운영돼 은행과 거래처들의 신뢰도 두터워졌다.
아버지는 항상 무리하게 기업을 키우려 하지 말고 한 우물을 파면서 잘 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생산 시설과 연구개발 투자는 과감했다. 꾸준히 시설 현대화를 통해 제품 개발에 힘썼다. 6·25 전쟁 전후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밀수되던 파일오버지(털 코트)를 개발해 외화 절약에 기여했다. 캐시미어 앙고라 특수지, 특수모이중지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잇달아 개발했다. 1962년에는 모직물 가공 설비를 확충해 방모직물 일관 작업을 시작했다. 1975년에는 국제양모사무국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했다.
-원래 가업을 이어받을 계획이 아니었나.
△사실 나는 기업인과 거리가 멀었다. 대학 시절에는 학보인 ‘연세춘추’ 첫 학생 편집장을 지냈다. 평소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했다. 그러다 1968년 사업을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부름이 결정적이었다.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과정에서 부채가 늘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회사는 아버지를 포함한 4인이 지분을 25%씩 나눠갖고 있었다. 암담했다. 단계적으로 빚을 갚아가기로 하고 여러 해에 걸쳐 한 명 한 명 지분을 정리해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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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방은 사업영역이 다양한데.
△‘쿠첸’은 내 작품이다. 직물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거로 판단돼 소득 수준이 높고 선진사회로 가면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하며 찾았다. 그리고 부산방직을 하면서 조그만 전기밥솥 만드는 몰딩 회사 ‘삼신공업사’를 창업했다. 이후 1979년 국제전열공업, 1999년 부방테크론, 2010년 리홈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2009년 웅진그룹으로부터 쿠첸을 인수해 2013년 리홈쿠첸으로 거듭났다. 2015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쿠첸이 독립 법인으로 분할했다. 2016년에는 매출이 2730억원을 기록하는 등 국내 밥솥 시장 2위에 올랐다. 사실 우리가 쿠쿠보다 먼저 시작했는데, 우린 다른 여러 가지를 하다 보니 많이 못 키웠다.
-어떻게 선박평형수 처리장치 사업을 세계 1위로 키웠나.
△부방테크로스는 선박평형수 처리 장치(BWMS)를 만들고 있다. 선박평형수는 무게중심을 유지해 선박이 안전한 운항을 할 수 있도록 선박에 채워 넣는 바닷물이다. 선박에서 화물을 하역하면 선박평형수를 주입해 무게중심을 맞추고 화물이 채워지면 선박평형수를 바다에 배출하는 과정을 거친다. 해운 업계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오염수로 평형수를 채우는 게 다반사였다. 여러 생물과 병원균이 존재하다 보니 배출 시 해양 생태계 교란에 악영향이 끼치는 원흉으로 지목됐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바다 오염을 줄이기 위해 2004년 선박평형수 관리법을 제정, 청정수로 선박평형수를 쓰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이후 국가 간 운항하는 선박은 의무적으로 선박평형수 처리장치를 탑재하게 됐다.
우리는 자체 개발한 전기분해기술을 활용해 ‘전해수 소독장치’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선박평형수 처리장치를 개발해 2006년 IMO로부터 세계 최초로 기본 승인을 받아 이 분야의 표준을 제시했다. 대부분 기업이 필터를 거쳐 전기분해, 자외선살균, 화학처리, 오존살균 등의 처리 방식을 거치는 데 반해 우리는 필터 없이 단 한 번의 처리만으로 선박평형수 내 유해 미생물을 살균할 수 있다. 선박평형수 처리장치를 생산하는 전 세계 70개 기업 중 전극을 직접 생산하는 2개 기업 중 한 곳이 우리다. 특히 해상용 전극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1000여 척이 넘는 선박에 제품을 설치하거나 납품했다. 제품 성능과 더불어 선박의 종류나 크기에 상관없이 설치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테크로스는 이제 전 세계 40조원 규모의 BWMS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7%의 선두 업체로 성장했다. 인수 첫해 120억원이던 매출액은 지난해 1745억원을 기록했다. 처음엔 여러 사업을 병행하다 보니 성장 속도가 더뎠지만 꾸준히 기술을 쌓아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게 됐다.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을 추구한 이유는.
△선친의 영향이 정말 컸다. 아버지는 항상 ‘크게 짓지 말고 속이 꽉 차게 만들라’고 하셨다. 외형만 키우려 하지 말고 사업의 본질을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 나한테는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아들들이 회사를 확장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로타리 세계회장을 역임했는데.
△로타리클럽은 아버지의 영향과 친구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1971년부터 참여하게 됐다. 벌써 55년째다. 중간에 몇 번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로타리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스스로 던지는 4가지 윤리적 질문(진실한가, 모두에게 공평한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는가, 모두에게 유익한가)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이곳을 그만둔다면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겠다는 결심이 희석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남았던 것이 현재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숫기가 없어 옆 사람이 얘기하면 나도 말을 하고 그랬다. 부산·경남지역로타리 총재를 지내셨던 아버지는 괜히 출마했다가 떨어지면 상처입을 수 있다며 일찌감치 출마를 말리셨다. 그런데 1988년 서울한강로타리클럽 회장을 맡았고 1995년에는 국제로타리 3650지구(서울 강북) 총재를 역임했다. 2008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로타리 세계회장으로 선출됐다. 2년간 미국 시카고에 상주하며 국제로타리 회장직을 수행하며 203개국 122만 회원을 대표하는 민간외교 수장 역할을 맡았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내가 세계회장이 됐다는 걸 아시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꿈을 현실로’(Make Dreams Real)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로타리안의 힘으로 세상의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전 세계 아동의 영유아 사망률 감소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당시엔 5세 미만 영유아가 하루 5만 명씩 죽어갔다. 아프리카에 갔더니 아이들의 상황이 비참했다. 어린이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죽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깨끗한 식수 제공, 위생 프로젝트, 교육 기회 확대 등 인도적 사업에 집중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후 영유아 사망률이 많이 떨어졌다.
‘소아마비 박멸’(POLIO PLUS) 운동에도 집중했다. 내가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그래서 게이츠재단과 협력해 소아마비 퇴치에 큰 진전을 이뤘다. 당시 게이츠재단에서 3억 5500만달러를 기부했고 국제로타리도 동일 기간 2억달러를 자체 모금해 총 5억 5500만달러 규모의 소아마비 박멸 기금을 조성했다.
이런 노력으로 1987년에는 연간 35만 건씩 생겼던 소아마비가 현재는 연간 10건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2건, 파키스탄 8건 등이다.
-요즘도 (소아마비) 통계에 관심이 많은데.
△당시 로타리클럽 회원들도 소아마비는 줄이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의사협회에서도 불치병이라 드라마틱한 감소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니 확 줄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건 내가 한 게 아니다. 모두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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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활동은 어땠나.
△2010년 12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해 3년간(2010~2013년) 재임했다. 당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내부 비리와 성금 유용 등으로 신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지방 조직과 중앙의 질서를 바로잡고 투명한 운영체계를 구축했다. 조직 내 반발도 많았지만 사회적 신뢰를 쌓는 데 보람을 느꼈다. 기부금의 사용 내역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기부정보확인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5000원 이상의 모든 기부에 대해 사용 내역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아너소사이어티 등 기부문화 확산에도 이바지했다. 이를 통해 재임 2년 만에 역대 최대 모금액을 달성하기도 했다.
-가업 승계 계획은.
△아들 둘이 각각 실무와 대외업무를 분담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첫째(대희)는 로타리클럽 등 대외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둘째(중희)는 지금 (기업) 체제의 실무를 총괄한다. 주식 등 지분관계도 명확히 정리해 형제 간 분쟁이 없도록 했다. 가업을 잇는 과정에서 형제 간 우애와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강관리는.
△척추 협착증 수술 이후 실내자전거와 아령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골프도 가끔 즐기며 건강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낀다.
-인간관계와 리더십에서 가장 중시하는 점은.
△상대가 나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 섭섭함보다 긍정적 기억을 먼저 떠올리려 한다. 져주는 미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리더로서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동건 회장 △1938년 경주 출생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국제로타리 회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현 부방그룹·테크로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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