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인생의 디폴트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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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칼럼] 인생의 디폴트 값

문화매거진 2025-08-25 12:26: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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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 버리고 온 졸업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 학교에 버리고 온 졸업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바쁜 일이 얼추 마무리되어 8월 한 달 동안은 모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았다. 이 여유를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그동안 시간에 쫓겨 손도 못 대던 그림을 서둘러 그리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꾸물대다 보면 어느새 일감이 밀려와, 하고 싶던 일을 시작조차 못 한 채 또다시 정신없이 허덕여야 한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일단 시작해 두면 바쁠 때도 틈틈이 이어갈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책을 만들어 왔다.

작년에는 왠지 작업이 손에 잘 잡히질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희한하게 다시 작업이 너무도 하고 싶다. 쓰고 싶은 글, 그리고 싶은 그림, 만들고 싶은 책이 잇따라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직장에 매여 있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고시원에 머물고 있어 작업할 공간도 없다. 침대 위에 간이 책상을 편 채 생활하는 형편이라 각종 작업 도구를 늘어놓을 수조차 없다.

돌이켜보면 이런 빠듯한 시간과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디폴트 값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단 한 번도 작업에만 몰두한 적이 없었다. 돈벌이가 시원찮아 선뜻 작업실을 얻을 수도 없었다. 늘 좁은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촘촘히 쪼개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주어진 조건에 맞추다 보니 작업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아예 물성을 잃었다. 지금 내 작업은 대체로 디지털 기기 속 가상 공간, 픽셀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동기가 가져간 내 졸업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 동기가 가져간 내 졸업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나는 회화과 출신이다. 대학에서 유화를 배웠고, 졸업 전시에도 캔버스에 유화를 그려 출품했다. 그렇지만 졸업 직후 대부분의 작품을 학교에 두고 왔다. 버릴 때 조금의 망설임도, 미련도 없었다. 서울에서 인천 본가로 옮기기도 귀찮았고, 마땅한 보관 장소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커다란 크기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는 작품들을 곁에 두고 매일같이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동기들이 내 그림을 아까워했다. 그중 한 명은 내 작품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에 가져갔다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그 동기는 지금도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을까? 

▲ 졸업 후 그린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 졸업 후 그린 작품 / 사진: 정혜원 제공


졸업 후 일 년 정도는 어떻게든 캔버스 작업을 이어 가려 노력했지만, 거대한 쓰레기를 양산하는 느낌을 끝내 떨치지 못해 그만뒀다. 당시에는 성격이 유난히 시니컬해서 삶도 작업도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았다. 지금은 모난 부분이 많이 둥글어졌지만, 애초에 마음가짐이 삐뚤었던 탓일까. 여전히 비좁은 방에서 가상의 화폭(프로크리에이트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작업은 즐겁다. 특히 디지털 작업은 언제 어디서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큰돈이 들지 않아 오래 지속할 수도 있다. 오로지 작업에 대한 욕구와 소재만 있으면 된다. 그런 점에서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드로잉만큼이나 나와 잘 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열등감이 고개를 쳐든다. 캔버스 작업을 하지 않으면 왠지 진정한 작가가 아닌 것 같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작년에 작업실을 얻었다. 본가에서 독립해 나만의 공간에서 물성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컨디션 난조로 방에 틀어박혀 지냈고, 작업실은 방치되었다. 계약이 끝날 즈음에서야 공간을 정리하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독립은 무슨 독립인가. 역시 난 글렀다고 자책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덜컥 행동에 옮긴 나 자신을 저주했다.

그런데 엊그제 애플펜슬로 그림을 그리다 문득 깨달았다. 작년에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지금 어설프게나마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취직도 했고, 독립도 했고, 다시 작업할 힘도 생겼다. 그리고 곧 고시원을 떠나 원룸으로 이사 간다. 그곳은 내 주거지이자 작업실이 될 것이다. 두 번 다시 작업실을 얻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실패가 거름이 되어 새로운 싹을 틔운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올해는 작년보다 다사다난하고 변화무쌍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힘들게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의 생활도 위태롭기만 하다. 그래서 마음속에 늘 불안이 넘실대지만, 돌이켜보면 이 또한 내 인생의 디폴트 값이었다. 그래도 확신한다. 분명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내게 알맞은 작업실을 얻으리라. 이번에는 결코 불안에 먹혀 작업실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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