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재판에서 무죄를 확정하자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7월 들어 50%를 넘었다. 이쯤 되면 흔히 말하듯이 삼성전자는 사실상 외국계 기업이라는 주장이 퍼질만 하다.
하지만 삼성생명 7.6%, 삼성물산 4.4%, 국민연금 6.5–7.4% 등 삼성 관계사는 물론 국내 주요 기관의 지분율이 높고 이재용, 홍라희, 이부진, 이서현 등 삼성 오너 일가 및 계열사들 역시 상당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오너 일가가 실질적인 지배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삼성전자는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약 20% 전후를 차지하는, 국가를 대표하는 수출기업이자 글로벌 경쟁력을 상징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난데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보조금 지급 대가로 삼성전자 등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와 나라 안팎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하면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을 비롯해 미국에 공장이 있는 한국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에도 인텔에 적용할 지분 인수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트닉 장관은 이미 반도체 기업 인텔에 109억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대신 10% 지분 인수를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같은 방식을 삼성전자 등에 확대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삼성전자는 바이든 정부 시절 미국 텍사스주에 370억달러를 투자하는 대신 47억4500만달러의 보조금을 받기로 했는데 정권이 바뀐 뒤 트럼프 대통령은 전 정권의 이같은 약속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거듭 밝혀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보조금을 지분으로 보상받겠다는 아이디어가 등장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삼성전자는 물론 SK하이닉스, 현대차 등의 미국 현지 투자 계획에도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만 하다.
논란이 확산되자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는 미국 언론에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대만 TSMC 같은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투자 약속을 늘리지 않고 있는 기업들은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미국 정부에 지분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등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짐이 곧 국가이다' 대신 '트럼프가 곧 국가이다'라는 유행어가 갖는 의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경제 칼럼니스트 그렉 이프는 최근 기고문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중국처럼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WSJ는 첫 사례로 트럼프 대통령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사임을 요구한 것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엔비디아와 AMD가 중국에 판매하는 특정 칩 수익의 15%를 정부와 공유하기로 한 것과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정부에 US스틸에 대한 '황금주'를 얻게 한 것도 대표적인 정치 개입 사례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칼럼은 "이것은 전통적인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아니고, 국가가 사실상 사기업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국가자본주의에 가까운 형태'다"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국가가 사기업의 경영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하이브리드 체제라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WP) 역시 지난 22일(현지시간) 사설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확보한 것과 관련해 "미국은 중국이 되는 방식으로 중국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일부 비주류 매체들도 트럼프의 엔비디아–중국 매출 수익 공유, 인텔 지분 확보 시도, 기업 평판 기반 우대 정책 등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정책들이 "사회주의 요소"를 담고 있다며 "주목할 만한 변화"로 분석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대에 루이 14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짐이 곧 국가이다"(L'état, c'est moi)를 변형한 "트럼프가 곧 국가이다"(L'état c'est Trump)라며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말이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트럼프 행정부의 민간기업에 대한 개입사례는 몇 가지 더 거론할 수 있다. 가령 중국산 배터리 부품, 희귀광물 등에 100%에 가까운 고관세를 부과하는 반면에 미국 내 전기차·배터리 공장 설립을 위한 보조금을 제시하면서, 미국산 부품 비율 조건을 명시하라고 요구하는 등 기업 활동 전반에 대한 간섭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 국방부가 미국 유일의 희토류 채굴·가공 업체인 MP머티리얼즈에 4000만달러를 투자해 최대주주로 올라갈 것이라고 대내외에 선포한 것도 국가자본주의 흐름과 무관치 않이 보인다.
이같은 흐름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변증법을 응용해서 해석하면 미국 민주당은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하지 않아 '트럼프식 테제'의 모순을 폭로하고 새로운 진리를 도출하는 '안티 테제'를 효율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어 당분간 트럼프식 독주는 지속될 전망이다.
◇미 행정부의 삼성전자 지분 보유가 현실화되면 노랑봉투법 등 국내 법안과 충돌 가능성 배제 못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 나와 "미국 관세협상 이후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효과는 살아있다"면서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가 (기존에) 우리보다 높은 관세가 적용됐다면 그 기존 관세에서 상호관세만큼 더 올라가는 것이고 특정 품목을 제외하고는 한국이 FTA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미 FTA가 사실상 무력화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많지만 협정이 당장 폐기되는 수순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말 그대로 트럼프 입맛대로지만 양국이 자유무역협정을 공식 폐기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미 FTA가 존속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면 무슨 일을 예상할 수 있을까.
지난 2012년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한미 FTA를 근거로 삼아 우리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제도'(ISDS·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를 통해 46억7950만달러(약 6조3215억원)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론스타 사건은 국내 정치 경제 전반을 아우르는 엄청난 스캔들을 몰고 왔고 그 원죄를 한미 FTA협정으로 돌리는 여론도 상당했다.
물론 당시 정부는 국무총리실과 기획재정부, 외교통상부, 법무부, 금융위원회, 국세청 등과 공동 보도자료를 통해, 론스타가 벨기에 법인 등을 통해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BIT)에 근거해 국제중재를 제기한 것이지, 한미 FTA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왔다. 반면에 론스타 측은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조항을 담은 한미 FTA를 제소 근거로 삼았다.
ISD는 한미 FTA의 핵심적인 투자 보호 조항이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한 국가(수용국)의 정책, 법, 규제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때, 그 나라의 국내 법원이 아닌 국제 중재기관을 통해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이다.
미국 정부의 삼성전자, 현대차 등 국내 기업들의 지분확보가 현실화되었을 경우 상법개정안, 노랑봉투법, 중대재해법 등 입법이 완료되거나 추진 중인 국내 법안들과 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미 행정부가 일정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 집단이 노랑봉투법 등으로 노사분규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할 경우 이를 문제삼아 미 행정부가 직접 국내 사법시스템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국제 중재기관의 심판을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개별 기업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 ISD를 활용한 케이스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국가자본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와는 전혀 다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국내에서 미 행정부의 삼정전자 지분 취득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강다현 KB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향후에 미 정부가 삼성전자 지분 취득을 결정한다면 중장기 긍정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히고 "오는 2029년 1월 20일까지 3년 5개월 남은 트럼프 행정부와 결속력 강화 계기로 작용해 관세 불확실성을 포함한 향후 정치적 리스크 축소가 가능하고, 칩스법 보조금 확대를 통한 삼성전자의 대미 투자를 자극하는 동시에 미 빅테크 업체로의 신규 고객 확보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가령 미 행정부가 우리 기업의 지분을 확보한 뒤 미국 전략 산업을 지정하면 AI(인공지능)·국방용 반도체 등 연방정부 및 국방부 수주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고 미국 내 다른 관련 기업들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 외 국가들 즉 중국, EU(유럽연합) 등과의 사업관계는 최악으로 치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미국 산업정책에 종속화되는 위험부담도 크다.
국내 대기업집단의 지분을 트럼프 행정부가 일정 부분 확보하는 기상천외한 제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현실화된다면 국내 정치·경제에 미칠 파장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것은 분명하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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