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체코 신규 원전 수주를 둘러싸고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합의가 뒤늦게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향후 경영실적과 사업 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공시가 이뤄지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자, 공기업이자 상장사의 책무를 저버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23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자본시장법과 거래소 규정은 상장사가 기업가치나 재무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계약을 체결할 경우 지체 없이 시장에 알리도록 하고 있다. 다만 계약에 비밀유지조항이 포함돼 있을 경우 세부 내용을 모두 공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 체결 사실과 기업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 등 최소한의 정보는 공시를 통해 알려야 한다는 게 규정의 취지다. 한수원과 한전은 이번 합의 사실조차 공개하지 않았고, 투자자들은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코 원전 프로젝트는 현지 정부가 추진하는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사업으로, 단일 사업 규모만 수십조 원에 달하는 초대형 발주다. 유럽연합(EU) 내 신규 원전 건설 시장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참여하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산업적 상징성이 크다. 프랑스 EDF, 미국 웨스팅하우스 등 글로벌 기업들이 경합하는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이 최종 입찰 후보에 올라 국제 원전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기회로 평가돼 왔다.
이처럼 한국 원전 산업의 기회로 기대를 모았던 체코 프로젝트와 달리, 이번에 드러난 합의 내용은 정반대의 부담을 안겼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알려진 합의에 따르면 웨스팅하우스는 앞으로 50년 동안 한국이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1기당 약 1조원 규모의 로열티 및 일감을 보장받도록 했다. 동시에 북미와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는 한국 기업의 수주 활동을 제한하고, 소형모듈원전(SMR) 독자 수출 시에도 웨스팅하우스의 검증을 거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한국의 원전 수출 전략과 미래 먹거리 산업에 구조적 제약을 가하는 조건이다.
한전은 이에 대해 “계약에는 비밀유지조항이 있어 세부 내용을 공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만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해명은 투자자 불신을 잠재우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시장에서는 주요 계약이 뒤늦게 알려진 사실만으로도 상장사의 투명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이로 인해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을 단순한 공시 누락의 문제가 아니라, 주주 신뢰와 자본시장 투명성 차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공기업이자 상장사인 한전이 시장과 주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투자자 보호는 물론 한국 자본시장의 국제적 신뢰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체코 원전 입찰을 둘러싸고 ‘굴욕 계약’ 논란까지 불거진 상황에서, 한전은 주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계약의 성격과 파급효과를 일정 부분 설명할 필요가 있다”며 “시장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 책임조차 회피한다면 결국 투자자들의 불신을 자초하게 되고, 자본시장 전반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웨스팅하우스 합의를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글로벌 조인트벤처나 전략적 협력 구도의 일환으로 제시한다면, 최소한의 설득력은 가질 수 있다”며 “그렇지 않다면 한국 원전 산업뿐 아니라 자본시장 전반의 신뢰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임시회의에서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전력 지분의 49%는 일반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다”며 “주주들이 회사가 어떤 계약을 체결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과반 지분을 쥐고 있으면서도 계약 적정성을 따지지 않았다면 배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국회 차원에서 이사회 논의 과정과 관련 문건을 철저히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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