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유럽연합(EU)이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의약품과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품목에 대해 관세 상한선을 미리 확보하고, 철강 제품에 대해서는 쿼터제 방식의 관세 조정 협의를 공식화하며 사실상 관세 완화 효과를 확보했다. 이번 합의로 EU는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미국과의 안정적인 교역 기반을 다진 반면, 한국을 포함한 주요 수출국들과의 경쟁 구도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양측은 21일(현지시간) 공동 성명을 통해 무역협정 관련 주요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 성명은 지난달 27일 정상 간 1차 합의를 토대로 약 한 달 만에 공개된 공식 문서로, 다자간 무역 분쟁이 재점화되는 흐름 속에서 미국이 특정국에 선제적으로 관세 상한을 명문화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미국이 EU산 의약품, 반도체, 목재 등에 대해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조사 중인 품목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기존 최혜국대우(MFN) 세율과 합산해 총 관세율이 15%를 넘지 않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부분이다. 이는 사실상 사전 관세 상한 합의로, 향후 조치가 확정되더라도 EU산 제품에는 상한선을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의 모든 주요 교역 상대국이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에 따른 품목관세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EU는 가장 먼저 명확한 상한 기준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조치에는 반도체와 의약품 외에도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이 포함돼 있어 유럽 제조업체들의 대미 수출에 상당한 안정성이 부여될 전망이다.
현재 미국은 EU산 자동차에 대해 2.5%의 MFN 관세 외에도 25%의 추가 관세를 적용해 총 27.5%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합의를 통해 향후 관련 입법이 완료되면 EU산 자동차에 대해서도 총 15%의 관세율이 적용될 예정이다. EU는 이를 위해 미국산 공산품에 대한 관세 철폐, 미국산 해산물·농산물의 수입 쿼터(TRQ) 확대 등을 이행 조건으로 수용했다.
EU 측 협상대표 마로시 셰프초비치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은 브리핑에서 "이달 중 이행 관련 법안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그럴 경우 8월 1일 이후 EU에서 수출된 자동차 물량에도 15% 관세가 소급 적용될 것이라는 약속을 미국 상무장관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철강 부문에서는 한국과의 이해가 얽혀 있는 민감한 사안이 포함됐다. 미국은 EU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현재 50%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지만, 이번 성명에서 처음으로 "공급망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며 저율관세할당(TRQ) 제도 도입 가능성을 공식 언급했다. 이는 지난달 EU가 자체적으로 발표한 내용과 일치하며, 사실상 미국이 이를 수용한 셈이다.
TRQ 방식은 일정 물량까지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초과 물량에만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적용 시 유럽산 철강에는 실질적인 관세 인하 효과가 발생한다. 반면 한국산 철강은 여전히 50%의 고관세가 유지되고 있어, EU가 TRQ 혜택을 받게 되면 한국 철강업계에는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불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이번 합의에는 유럽산 일부 품목에 대한 관세 면제도 포함됐다. 9월 1일부터는 유럽산 항공기 및 항공 부품, 미국 내 생산되지 않는 특정 천연자원, 복제약, 화학 원료 등에 대해 기존의 MFN 세율이 계속 유지된다. EU 측은 이 품목들의 MFN 세율이 대부분 0% 또는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들어 사실상 무관세 혜택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EU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인 와인·주류는 면제 품목에 포함되지 못했다. 셰프초비치 위원은 "미국 측도 이 산업이 EU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며, 협의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며 "공동성명에 '면제 품목 추가 모색'이란 문구가 들어간 만큼 향후 논의 여지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EU는 미국의 우려가 컸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해서도 일부 유연성을 확보하기로 합의했다. EU는 공동성명에서 "미국의 우려를 반영해 기존 면제 기준에 더해 시행 과정에서 추가적인 유연성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CBAM은 EU 역외에서 생산된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 탄소 집약 제품에 대해 생산 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근거로 사실상의 탄소세를 부과하는 제도로, 미국을 포함한 여러 무역 파트너들의 반발을 샀다.
또한 디지털 무역, 기술 규제와 관련해 비관세 장벽 해소와 협력 확대 방침도 함께 명시됐다. 다만 EU 측은 이번 합의가 유럽연합의 자주적 규제인 디지털시장법(DMA)과 디지털서비스법(DSA)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번 합의는 향후 미국의 통상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교역국들은 EU와의 차별적 조치 여부에 대해 면밀한 대응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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